◎「고비용저효율」 구조개선 성과 미흡/올 무역적자 200억불 임박… ‘한계 상황’지난해 11월 우리나라의 수출규모가 사상 처음 1천억달러를 넘어서면서 무역의 날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연말까지 1천2백50억6천만달러의 수출을 기록, 전년동기 대비 30.3% 증가라는 경이적 기록을 세웠던 한해였다. 반도체업계가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구가하면서 단일회사 최대순이익, 단일품목 최대 수출 등 각종 휘황찬란한 기록을 단번에 세웠던 상황이었다.
지난해 무역적자규모가 1백억달러를 넘기는 했지만 수출 1천억달러 돌파에 묻혀 우리나라 경제규모에서는 무난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치부되었다.
반면 올해 무역의 날은 쓸쓸하다 못해 흉흉한 분위기다. 무역수지가 사상 최대규모를 기록하는 것은 아예 체념한 상태고 적자규모가 과연 2백억달러를 넘느냐 아니냐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실정이다.
반도체 국제가격이 작년의 절반 이하로 급락하면서 반도체 수출이 급격히 줄어든게 주범이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품목도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 수출경쟁력이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느냐는 자아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올 한해처럼 「경쟁력」이란 용어가 널리 입에 오르내린 시기를 기억하기 힘들 정도다.
정부는 지난 4월 이후 무려 6차례나 수출촉진을 위한 각종 대책을 쉴새없이 퍼부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급기야 지난 10월9일에는 「경쟁력 10%이상 높이기 추진방안」이라는 군사작전식 대책까지 내놓았다.
그럼에도 지난 10월까지 수출은 1천64억8천만달러로 전년동기대비 4.6% 증가에 그친 반면 수입은 10.6%나 늘어난 1천2백32억9천만달러로 무역적자(수출입차)가 이미 1백68억1천만달러에 이르고 있다.
사실 올해 무역수지가 지난해보다 크게 늘어날 조짐은 지난해부터 나타났다. 반도체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제기됐고 과소비 열풍, 유가상승등으로 수입증가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진작부터 지적되었다. 반도체 가격하락으로 수출은 줄어들고 수입이 계속 늘어나다 보면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은 뻔한 사실이다.
이같은 상황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반도체 등 특정 품목에의 의존도를 낮추고 수출경쟁력을 강화하는 것 외에는 경제를 회복시킬 도리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가고 있다.
특히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지적된 「고비용·저효율」구조를 개선하는게 시급하다는데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정부와 기업을 중심으로 한 고비용·저효율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은 적지 않았지만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고비용구조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중 하나가 비싼 땅값이다. 고지가는 공업용지 부족을 부르는 요인으로 오래 전부터 지적되었다. 지가경쟁력을 판가름하는 요소인 공업단지 분양가격은 일본, 대만, 동남아 등에 비해 2∼20배 정도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이 몰려가는 영국의 경우 공업용지를 공짜로 제공하다시피 하고 있다.
더구나 기업이 공장을 지을 때 공장입지 등 각종 토지관련 인허가절차가 1백20개를 넘어 시간과 비용을 마구 잡아먹고 있다. 부동산 투기억제 때문에 각종 관련세제도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운용돼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가로막고 있다.
물류비용도 고지가와 함께 대표적인 경쟁력 저해요인으로 꼽힌다. 철도, 항만, 공항 등 취약한 사회간접자본(SOC)이 물류비용을 높이면서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 93년기준 물류비용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나라가 15.4%로 미국(10.5%), 일본(14.5%)보다 훨씬 높았다.
임금과 금리가 경쟁력 약화요인이라는 것은 해묵은 얘기지만 개선조짐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생산성 증가율을 초과하는 높은 임금상승률은 결국 우리나라의 임금수준을 주요 경쟁국보다 높게 만들었다. 94년기준 우리나라 제조업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수준은 1천2백73달러로 연간 급여로 환산할때 1인당 국민소득의 1.8배에 달한다. 일본 1.19배, 대만 1.2배, 싱가포르의 0.89배등에 비해 월등한 수준이다.
최근 금리가 하향안정세를 보이는 듯하더니 다시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색된 금융구조, 만성적인 자금수요 초과상태 등으로 명목금리는 물론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도 주요 경쟁국의 2∼3배수준에 이르고 있다. 작년말 기준 실질시장금리(회사채 수익률 기준)는 연9.3%로 대만(3.6%), 일본(2.7%), 싱가포르(3.9%)에 비해 턱없이 높은 상황이다.
기업의 재무구조도 좋은 편이 아니다. 외부자금 의존도가 높은 재무구조 때문에 감기만 걸려도 기업의 명운이 오락가락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제조업체의 자기자본비율은 25.9%. 자금의 4분의 3이 외부자금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매출액대비 금융비용 부담률은 높을 수밖에 없다.
94년기준 매출액 대비 금융비용 부담률은 5.6%로 일본(1.6%), 대만(1.7%)의 3배를 웃돌고 있다. 국내 기업이 제품 1만원어치를 팔면 이중 5백60원이 이자로 나가지만 일본과 대만기업은 1백60원, 1백70원의 이자만 내면 된다는 의미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요소들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운데 구태의연한 행정규제마저 정상적인 기업경영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스위스 국제경영연구원(IMD) 분석에 따르면 주요 제품의 가격 결정에 미치는 정부의 영향력은 우리나라가 비교대상 44개국중 두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정책의 투명성도 36위로 최하위를 맴돌았다. 정부가 제품가격을 멋대로 좌지우지하고 애매모호한 정책운용으로 각종 부조리가 판치는 풍토를 조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경쟁력 10%이상 높이기에 앞서 핵심적인 행정규제를 완화, 공정한 경쟁여건을 조성해야 기업체질이 강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노사관계의 룰을 하루빨리 정비해야만 생산적인 노사관계의 구축이 가능하다는 불만이 노사 양측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경쟁력 강화를 구호로만 외치기에 앞서 정부가 행정규제 완화 등으로 솔선수범하면서 엄정한 중립자, 룰 집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만 내년 무역의 날을 쓸쓸하지 않게 맞이할 수 있을 거라는 주문이 많다.<이세정>
◎인터뷰/구평회 한국무역협회 회장/“제도·관행 효율화로 어려운시기 돌파하자”/OECD 가입 「의식 선진화」 계기/무협,수출 경쟁력제고 앞장설것
『수출부진을 해소할 수 있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우울합니다. 특히 과거와 달리 기업은 물론 정부, 노동자 모두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구평회 한국무역협회회장은 제33회 무역의 날을 맞는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그렇지만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다. 구회장은 『지금의 어려움을 보다 멀리 뛰기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회장은 이를 위해 『각 경제주체의 역할과 기능을 재정립하고 제도 및 관행 등 경제운용시스템을 효율화시켜 선진경제로 가기 위한 발전기반을 다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년동안 호조를 보였던 수출이 급속히 부진해지고 있다. 그 이유와 내년도 수출 전망은.
▲수출단가 하락, 해외수입수요 위축, 경쟁력 약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주요인이다. 특히 반도체, 석유화학 등 수출주력품목의 가격하락과 국내의 고비용·저효율구조의 지속은 우리제품의 경쟁력을 급속히 악화시켰다. 내년에는 올해와 같은 악재가 예상되지 않고 해외수요가 다소 호전될 것으로 기대돼 수출증가율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늘어남에 따라 국내 산업공동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국내기업들의 해외진출은 고금리, 고지가, 고임금, 고물류비 등 국내기업환경중 어느 것 하나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주요인이다. 그러나 기업들의 해외투자는 시장확보, 기술습득, 디자인 개발, 생산비용 절감 등 장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이점도 많다. 물론 제조업부문 대신 서비스업종이 공동화부문을 차지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루 빨리 국내기업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국내에서 생산하더라도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OECD 가입이 우리경제, 특히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보는지.
▲OECD에 가입하는 것은 우리가 어차피 겪어야 할 문제이고 우리 체질을 선진화시키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OECD가입 자체만으로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우리의 정책이나 관행 및 의식을 선진화하여 선진국진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수출지원책과 관련해 건의할 사항은.
▲WTO(세계무역기구) 출범으로 정부의 재정에 의한 직접적인 수출지원이 점진적으로 축소·폐지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수출지원책은 WTO에서 허용되고 있는 관세환급, 수출보험, 기술개발지원, 세제상의 인센티브를 대폭 확충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무협은 지난 50년 동안 우리나라 수출증대를 위해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내년부터 무역진흥기금이 없어지는 등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무협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97년은 무협의 새로운 50년이 시작되는 전환점이다. 특히 지난 69년부터 지원받은 무역진흥기금이 없어지기 때문에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홀로서야 하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다 WTO 출범을 기점으로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우리 경제계에도 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무협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고진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