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12월 27일] 사극(史劇)의 여걸시대

지난해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TV 사극이 풍작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주인공이 우리 역사의 한 장(章)을 주름잡은 여걸들이라서 더욱 흥미롭다. KBS가 오는 2009년 1월3일부터 80부작 ‘천추태후’를 주말극으로 내보내고 뒤이어 SBS는 2월부터 수목드라마로 50부작 ‘왕녀 자명고’를 방영한다. 또 MBC도 5월부터 50부작 ‘선덕여왕’을 월화드라마로 방영할 예정이다. 천추태후는 고려 태조 왕건의 손녀로 제7대 임금 목종의 모후였다. 어린 아들이 등극하자 고려사 최초의 섭정이 됐고 여진과 거란에 맞서 북쪽 변경의 방위를 튼튼히 했다. 또 문약한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의해 스스로 제후국(諸侯國)의 지위로 격하를 자초했던 나라를 다시 자랑스러운 제국(帝國)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주체적 자주성을 지켜냈다. 선덕여왕·천추태후 등 재조명 신라의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다. 수많은 진골 남성의 도전을 뿌리치고 왕위에 올라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서 국토를 지켜냈고 안으로는 불교 진흥을 통해 국론을 통일하고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추구했다. 또 김춘추와 김유신 등 문무에서 뛰어난 인재를 발탁해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주역이기도 했다. 한편 왕녀 자명고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로맨스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낙랑공주의 이복언니인 자명공주가 주인공이라고 한다. 자명공주라는 여성은 그 어떤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순전히 작가의 창조물이다. 자명공주는 이복동생 낙랑공주가 호동왕자의 ‘미남계’에 넘어가 나라를 망치자 낙랑국 재건에 앞장선다고 한다. 이 밖에 평강공주와 온달 장군 부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 남매 등을 주역으로 한 사극도 기획되고 있다니 새해에는 안방드라마의 여걸시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사극에 갑자가 여걸 바람이 부는 것일까. 사실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동안 수천년간 남성의 횡포에 억눌려 지내던 여성의 위상이 바야흐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상은 쉴 새 없이 변하고 여성의 지위도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것과 비례해 가정에서 아내ㆍ며느리ㆍ딸들의 발언권도 높아졌다. 이야 말로 세상이 전처럼 남성 중심으로 굴러가지 않게 됐다는 좋은 반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안방극장에서도 우리 역사를 빛낸 이런저런 여걸들의 모습을 재조명하게 된 듯하다. 한편 사극이 전에 없이 큰 인기를 누림으로써 그동안 우리 역사에 무관심했던 시청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주인공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극 붐을 일단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높은 인기에 반비례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역사왜곡의 우려가 높은 점이다. 이는 그동안 방영됐거나 현재 방영 중인 사극을 살펴볼 때 전혀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다. 인기에 집착 역사 왜곡 말아야 사극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대원칙이다. 그 전제조건을 함부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역사소설이나 역사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사극은 그 소재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겠다는 단순한 욕심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무제한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재미를 위하고 시청률을 의식했다 하더라도 두 아이가 딸린 과부 소서노를 처녀로 설정하고,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을 오라비로 남의 집 족보를 바꾸고, 남자가 분명한 신윤복을 느닷없이 남장여자로 둔갑시킨 것 등은 단순한 무지나 왜곡을 넘어선 망발의 수준이었다. 따라서 새해에 선보이는 사극에서는 시청률을 내세워 역사를 날조하거나 왜곡하는 작태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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