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아라파트 사망]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사

사망한 야세르 아라파트(7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그만큼 그의 사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양상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의 반목(反目)과 투쟁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현재 양쪽이 대치하고 있는 지역은 구약성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언급된 가나안이다. 유대인들은 외세의 침입으로 가나안에서 쫓겨나 2천여동안 유랑생활을 하다가 1800년대 말 시오니즘(유대인 조국재건운동)이 번지면서 선조들이 땅인 팔레스타인복귀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이런 움직임은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고 있었던 영국의 정책에 의해 촉발됐다. 영국이 1917년11월 `발포어 선언'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국가 건설을 용인하자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서서히 이주해 들어오면서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간의 충돌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후 1947년 유엔총회가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키로 의결함에 따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은 본격화됐다. 이듬해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포하고 미국과 소련이 이를 즉각 승인했다. 그러나이에 반발한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5개국이 이스라엘을공격하면서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0%를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인 100만명이 강제 추방되면서 무장단체를 결성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전쟁으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요르단령으로 분할됐다. 1964년 5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첫 아랍정상회담에서 아랍연맹의 지원으로 창설됐고 같은해 팔레스타인해방군(PLA)이 결성돼 대(對)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PLO의 초대 의장은 변호사 출신인 고(故) 아흐마드 슈크리였다. 1967년 파타 지도자 아라파트가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PLO는 본격적이고 장기적인 게릴라투쟁을 펴기 시작했다. 유엔 총회는 1974년11월 팔레스타인의 주권과 민족국가 건설 권리를 인정했다. 이후 1988년11월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에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선포,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1987년 이스라엘 점령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제1차반(反)이스라엘 봉기(인티파다)를 일으키면서 유혈사태가 악화됐으나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오슬로 평화협정에 조인, 지리한 평화협상이 진행됐다. 이듬해인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했고 1996년 초 아라파트가 자치정부초대 수반으로 선출됐다. 이스라엘 극우파의 득세와 이에 따른 유혈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라파트는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2000년7월 이른바 `캠프 데이비드' 협상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그 후 2000년9월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의 이슬람 성지 방문사건이 돌출해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면서 평화협상은 피의 파국을 맞고 말았다. 지난해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러시아, 유엔에 의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등 중동평화 로드맵 구상이 마련됐지만 이슬람 과격단체 하마스의 예루살렘 버스테러로 논의 자체가 연기됐고, 올 3월 이스라엘군이 하마스의 창설자 셰이크 아메트야신을 보복암살함으로써 로드맵 자체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빠지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