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홍길동도 울고 갈 신용등급 둔갑술

발행기관 수수료에 목매 BBB등급 기업도 A로 평가<br>평가비용 투자자 부담 등 공정평가 기반 마련해야


"내가 문제 하나 낼까요. 홍길동보다 둔갑술에 능한 게 누구일까요."얼마 전 금융투자업계의 한 간부를 만났을 때 그가 던진 질문이었다. 무슨 얘기인지 몰라 머뭇대자 그가 다시 말했다. "모르는 모양인데…. 신용평가사예요. 홍길동은 자기모습만 바꾸지만 신평사는 기업을 둔갑시키거든요."

일리가 있는 얘기다. 요즘 시장에서 신평사들이 산정하는 신용평가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기업의 신용등급을 발행기관의 입맛에 맞게 '둔갑'시키기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나 보험 등 상당수 기관투자가들조차 신평사를 못 믿어 자체 신용평가팀을 꾸리고 등급을 매긴다고 하니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만하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웅진홀딩스의 사례를 한번 보자. 지난해 6월 웅진홀딩스가 300억원 규모의 1년 만기 무보증 회사채를 발행했을 때 신평사들이 부여한 신용등급은 A-였다. 하지만 9월에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D'로 깎아내렸다. A급의 우량기업이 불과 석 달 만에 디폴트(채무불이행)기업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 신용등급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뿐만 아니다. 해외에선 투자적격 등급을 겨우 넘긴 기업이 국내에서 최고 등급을 받기도 한다. 현대자동차의 해외 신용등급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기준으로 BBB+였지만 국내에서는 무려 6단계나 높은 AA+를 받았고 SK텔레콤과 GS칼텍스ㆍ신한카드 등도 국내 등급이 해외보다 5~7단 높다.


기업의 내용이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아닌데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평사가 기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 신평사는 기업의 부도 가능성을 평가해 신용등급을 매기고 같은 등급 중 실제 부도기업비율을 통해 신뢰성을 검증한다. 문제는 이 부도율이 적합한지 판정하는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등급의 적정 부도비율은 1%'라는 목표부도율을 가지고 있는 신평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실제 부도율이 5%로 치솟으면 평가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평사 중 목표부도율과 같은 평가기준을 세워 놓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깜깜이 평가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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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원인은 시장시스템 안에 있다. 기업은 회사채 등을 발행할 때 신평사를 직접 선택해 수수료를 내고 등급을 받는다. 일부 그룹은 아예 계열사 전체의 신용평가를 한 곳에 몰아주고 뭉칫돈을 주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수수료로 먹고사는 신평사로서는 발행사의 눈치를 안 볼 재간이 없다. 결국 BBB등급은 A로 둔갑하고 A는 더 높은 AA로, AA는 AAA로 밀려 올라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우리나라에서 신용등급 A 이상인 기업비율이 전체의 74.8%로 미국(21.9%)ㆍ유럽(19.7%)보다 3배나 많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는 신평사가 발행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평가를 할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해야 한다. 우선 수수료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우선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 같은 기관투자가들이 기금 풀을 만들어 기업 대신 신평사에 평가비용을 지급하는 '투자자 수수료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대안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현재 기업 회계에 적용하고 있는 의무 지정인 제도를 신용평가에 도입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기업으로 하여금 3년 또는 5년마다 평가기관을 바꾸도록 한다면 어느 정도 수수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만큼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체 목표부도율을 책정하는 등 평가의 정확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가뜩이나 환율이 급등락하며 국내 주요 기업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때다. 이런 상황에서 신용불신까지 겹친다면 시장으로서는 최악이다. 제대로 된 신용등급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2008년 전세계를 강타한 서브프라임 사태가 경기부진과 함께 찾아온 기업과 수익증권의 부실평가에서 발생했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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