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신부ㆍ미래사목연구소장, 인천가톨릭대 교수>
대한민국 성탄절의 상징 애기봉 크리스마스트리는 올해 유난히 썰렁해 보인다. 날씨도 춥거니와 남북으로 부는 바람은 더욱 쌀쌀하기만 하다. 갑자기 서해에서 형성된 한냉기류는 나눔의 손길마저 꽁꽁 얼어붙게 했다. 게다가 난데없는 구제역 기습으로 전국 농가는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송년회가 강연회로 바뀌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웃을 일인지 울 일인지, 필자는 그 덕에 더욱 바빠졌고‘바보 존(Zone)’특강 자리는 연일 미여 터진다. 이 긴장과 추위와 절망을 녹일 명약은 바보스러움이기 때문일까.
그래도 상가들과 백화점 네온사인은 더욱 화려하다. 반갑고 고맙다. 눈이라도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금하다. 올 성탄절 우리의 아기 예수님은 어디에서 다시 태어나실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 힌트를 준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구유는 낭만이 아니다. 구유는 말의 여물통이다. 말똥이 묻어있고 오줌냄새가 배어있는 여물통. 가장 낮은 자리, 이곳에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눕혀졌다. 여관방 빌릴 곳도 없어서 밀려나 마구간 여물통에 눕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난의 극치다.
그렇다면 이제 자명해진다. 올해 아기 예수님께서 임하실 자리는 밀려난 자리, 가장 낮은 자리, 가난의 골짜기라는 얘기다. 이는 복음 중의 복음, 가장 통쾌한 희소식이다.
일찍이 이 비의를 깨우쳤던 사람이 성 니콜라스다. 그는 3세기 말 소아시아 리치아(지금의 터키) 지방의 파타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교박해 때 투옥됐다가 사형직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선언으로 풀려났다. 그는 고아와 전과자와 창녀와 가난한 어부와 병자들의 친구였다. 그는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한밤중에 선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자루를 들고서 가난하고 병든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남몰래 선물을 나눠주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의 표양을 추앙해 ‘성 니콜라스(St. Nicholas)’라 불렀다. 이 발음이 변하면서 ‘산타클로스’로 바뀌었다.
산타클로스로 인해 생겨난 성탄절 나눔의 전통은 시대마다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꽃을 피우고 있다. 경제 대공황 시절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피터의 아빠는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어 잔뜩 주눅이 든 가족들에게 재미있는 놀이를 제안했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거야, 서로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그림으로 그려서 주면 되잖아.”
드디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었다. 아빠는 빛나는 검정색 리무진과 빨간색 모터보트를 선물로 받았다. 엄마는 다이아몬드 팔찌와 새 모자를 받았다. 어린 피터는 수영장 그림과 잡지에서 오려낸 장난감을 받았다. 이제는 피터가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차례였다. 피터는 얼굴 가득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밝은색 크레용으로 남자, 여자 그리고 사내아이가 그려진 그림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림 밑에 서툰 글씨로 꼬불꼬불하게 힘들어 쓴 한 단어를 보고 가족들은 감격에 겨워 서로 꼭 부둥켜안았다. 그것은 ‘We’ 곧 ‘우리’라는 글씨였다.
이번 성탄절에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느라고 고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정녕 그 선물들은 상대방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선물이 ‘우리’라는 선물보다 더 귀하고 값질까.
성탄절은 단 하루이지만 우리가 365일을 성탄절처럼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느 수도원에서 성탄절 날 아침, 수사들은 모두 들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원장은 달력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목요일이군. 난 차라리 목요일을 경축하고 싶어.” 수사들이 의아해 하자 이를 눈치 챈 원장이 말했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오늘’이 아니라 ‘성탄절’을 즐기지. 그래서 그들의 즐거움은 잠깐인 게야. 하지만 ‘오늘’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은 날마다 성탄절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