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과정을 탐험이라고 한다. 탐험에는 많은 어려움과 예기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모험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모험이라는 말 속에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성공과 실패라는 양면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출판은 유독 위험 부담이 높고 벤처산업으로 분류되니 출판인은 곧 모험가이기도 한 셈이다.
사실 새로운 신간을 기획할 때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노심초사하기 마련이다. `소리 나는 그림책(sound book)`을 기획할 때 심정이 그랬다. 소리 나는 그림책에 대한 구상은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다. 책 속에 소 그림이 나오면 소 울음 소리를, 오리 그림이 나오면 오리가 꽥꽥거리는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동 응답 전화에 생각이 미쳤다. 전화를 걸어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지금은 부재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하는 자동응답은 여러 사람이 메시지를 남겨도 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쳤다. 알고 보니 메모리 반도체를 전화기에 내장해 소리를 녹음했다가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 길로 반도체 생산회사에 알아봤으나 내가 원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삼성ㆍLGㆍ아남ㆍ현대 등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도 한 가지 음성만 녹음했다가 재생하는 반도체만 생산할 뿐 7~8가지 소리를 따로 저장했다가 재생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협력 업체인 정우실업 박영상씨가 반도체 설계의 전문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즉시 찾아가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의논했더니 그 정도라면 문제없다고 했다. 다만 개발비용이 문제였다. 책 한 권 내는데 2억의 예산은 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영업에 대한 불안감을 다소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소리 나는 그림책이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이기에 과감하게 일을 추진했다.
우선 소리를 함께 담아낼 동물을 선정해 그림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사운드 북에 적합한 동물 소리를 수집하고 편집 해서 정우실업에 넘겨 주었다. 정우실업에서는 메모리칩 설계를 끝내 대만에 있는 미국계 회사에 생산을 의뢰했다. 원래는 국내 생산을 목표했으나 생산단가가 입이 떡 벌어지도록 비싼 것은 물론, 몇만 개 정도는 너무 소량이어서 생산할 수도 없다고 했다.
메모리 칩이 만들어지는 동안 국내에서는 사운드팩 금형이며 그 안에 필요한 스피커, 건전지 등 부품을 준비했다. 외국에는 이미 사운드 북이 나와 있다고 했지만 견본도 없었고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과정마다 시행 착오를 겪어야 했다. 단순한 종이 책이 아니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겸용한 반전자책이었기 때문이다.
1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쳐 소리 나는 그림책이 첫 선을 보이게 된 것은 1992년 5월이었다. 닭ㆍ고양이ㆍ오리ㆍ개ㆍ소ㆍ돼지ㆍ염소ㆍ말의 그림을 보고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책은 정가가 1만2,000원으로 출시됐다. 책은 나오자마자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며 곧바로 예림당의 주요 매출원이 되었다. 오랜 노력이 보람 있는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첫번째 동물 사운드 북에 이어 두 번째로 기차며 비행기 등 여러 가지 탈것들도 소리와 함께 담아냈다 또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등의 소리를 따라 해보며 인사예절을 배우는 책, 구구단을 반복해서 들으며 외도록 도와 주는 `소리나는 구구단`과 알파벳과 간단한 단어를 익힐 수 있는 `소리나는 ABC` 등을 사운드 북 시리즈로 속속 개발했다.
<현상경기자 hs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