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유리알 회계 아직 멀다] 1.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기업인이 작성하고 한국의 회계사가 감사한 재무제표는 믿지 못하겠다는 해외의 불신에 경제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국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새 살이 돋듯 증시를 비롯한 경제 곳곳에 활력이 되살아나고 있는 지금, 과연 경제개혁 성공의 관건이라 할 수 있는 회계투명성은 어느 정도나 나아졌을까. /편집자 註 1950년대 미국 회계법인들이 발칵 뒤집혔다. 회계법인의 부실감사에 대한 투자자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연방법원이 잇달아 투자자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회계법인들은 그동안 번 돈을 몽땅 털어 투자자의 손해를 물어줘야 했다. 손배능력이 없는 회계법인의 경우 무한책임을 진 파트너들이 개인재산까지 털어야 했다. 회계법인의 입장에서는 길고도 끔찍한 소송의 터널이 시작된 것이다. 그 끔찍한 소송의 터널이 새 밀레니엄을 앞둔 한국의 회계업계 앞에 놓여 있다. 한보·기아·대우로 이어지는 부도사태와 워크아웃을 거치면서 거액의 손해를 본 채권단과 투자자들이 회계법인들의 감사책임에 대해 잇따라 소송을 걸거나 걸 채비를 하고 있다. IMF와 합의한 경제개혁의 핵심사안인 회계투명성에 대한 내외의 시각이 여전히 부정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소송러시는 기존 회계의 틀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회계는 기업의 언어다. 일정기간 동안의 기업활동이 만국공용어인 수치로 표현된 것이다. 회계장부가 조작, 왜곡됐다는 것은 기업과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간의 의사소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비정상적 의사소통은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가져온다. 은행은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엉터리 기업에 고객의 귀중한 돈을 쏟아붓는다. 주식투자자는 거짓정보에 속아 가진 재산을 날린다. 종업원들은 망해가는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친다. 회사의 최고경영자도 결국 왜곡된 정보에 휘둘려 엉뚱한 의사결정을 내린다. 분식회계는 부메랑처럼 결국 회사를 무너뜨린다. 투명한 회계는 선진화된 회계기준, 경영자의 정직한 회계처리, 전문가적 양심과 능력을 가진 회계감사 등 세가지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IMF 체제 이후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이 세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추진됐다. 국제사회와는 동떨어진 낙후된 회계기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는 한편 독립적이고 공정한 민간 회계기준제정기구를 만들어 유리알 회계로 나아가는 첫단추를 채웠다. 정부는 또한 기업현장에서 투명한 회계처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광범위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했다. 회계뿐 아니라 경영 전반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배구조부터 개선할 것을 기업에 주문했다. 분식결산이 총수 등 소수의 전횡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30대 그룹에 대해서는 결합재무제표 작성을 의무화했을 뿐 아니라 내부감사의 책임과 권한을 늘려 내부통제를 강화하도록 했다. 기업의 재무제표를 감사하는 회계사나 회계법인에는 부실감사의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며 감사의 질을 높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 규정을 본따 감사준칙을 개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제도상으로는 유리알 회계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것처럼 보이나 회계당국이나 업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거북이처럼 한걸음씩 나아가던 투명성이 대우사태라는 복병을 만나 순식간에 뒷걸음질쳤다. 지난해 말 대우 계열사를 감사한 회계법인들은 2개사(대우전자·대우전자부품)를 제외한 모든 계열사에 대해 적정의견을 내렸다. 1년도 버티지 못할 기업들의 재무제표가 적정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외부감사의 기능은 기업 재무상태의 적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회계기준에 따라 재무제표가 적정하게 작성됐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영속성이 회계의 대전제이고 정보이용자에게 주는 영향을 고려할 때 지난해 말 대우 계열사에 대한 회계법인들의 적정의견은 회계투명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놓았다. 대우뿐 아니라 모든 기업이 다 그럴 것이라는 냉소 속에 유리알 회계는 이룰 수 없는 신기루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부실회계의 상당한 책임을 회계법인에만 전가하려는 여론도 적지않다. 금융감독원도 회사경영진 못지 않은 책임을 외부감사인에게 물으려 하는 분위기다. 이에 대해 회계법인 관계자는 『부실회계의 주체인 회사 경영진과 이를 감사한 회계사에게 동일한 책임을 묻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반박한다. 문책이 모든것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구조적인 회계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는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회계도 다른 경제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회계정보가 생산, 유통, 저장되는 전과정이 선진화되지 않고서는 유리알 회계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다. 회계 인프라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는 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이장규기자(美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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