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고 장기영 부총리 경제개발 비화공개/한중경제지식교류 국제심포지엄

◎경제개혁조치 3년간 백여건/외자 과감도입 통한 개발모델 적중/수출산업 건설·각종 부흥사업 “밑거름”/금리현실화속 물가안정 병행 추진/포철·경부고속도 등 차관사업 결실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동북아경제포럼이 후원하고 동아시아경제연구원(이사장 남덕우)이 주관하는 제8차 한중경제지식교류 국제심포지엄이 지난 26일 삼성동 무역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이틀째 계속돼 열띤 토론이 전개됐다. 이날 박병윤 서울경제신문 편집인(전무)은 「한국경제개발 초기의 외자도입 정책」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외자도입을 통한 성장전략을 채택해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당시 장기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의 개혁정책을 소개했다. 주제발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한국경제개발 초기의 외자도입정책을 설명하려면 당시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한 사람의 걸출한 경세가­장기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경제개발을 위해 각종 개혁정책을 이끌어낸 장기영 전 부총리는 중국 송나라 신종때의 대개혁가 왕안석에 비교되는 인물이다. 삼지정사(부재상­후에 재상) 왕안석이 기존 관료조직과 반대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억세게 부국강병책­신법(균수·청묘·시역법, 보갑·보마·모역법등)을 밀어 붙였던 것처럼, 장기영 부총리도 여러반대세력의 반발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이라는 하나의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종 개혁정책을 끊임없이 이끌어 냈다. 외자도입에 의한 경제개발은 초기 한국경제개발정책을 이끌어온 장기영 전부총리가 불도저처럼 밀어 붙여가며 일구어낸 성장전략이었다. 실제로 그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당시 한국에서 외채에 대한 경계와 우려는 매우 심각했다. 정부, 언론, 국민 모두 외채는 채권국에 대한 경제예속이라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쓰라린 역사적 경험때문이었다. 구한미 기울어져가는 조선정부는 각종 소비물자를 도입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나라 빚을 마구 들여와 1907년에는 나라빚(국채)이 당시 정부예산과 맞먹는 1천3백만원에 달했다. 이것은 일본이 무력침탈과 함께 조선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쓰라린 역사적 유산때문에 외자를 경계했다. 특히 언론은 호된 비판을 퍼부었다. 그러나 장부총리는 비판세력을 끈질기게 설득하면서 신념을 갖고 밀어 붙였다. 1964년 5월1일. 한국의 유력일간지 한국일보사장에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에 기용된 장기영씨. 그는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국민을 상대로 『6개월만 참아달라』고 자신있게 포부를 밝히고 정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24시간 뛰었다. 그의 재임 3년반동안 이루어낸 주요개혁정책은 50여개, 관련시책까지 포함하면 1백여개를 헤아린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경제장관회의를 신설해 이를 주재하면서 대화와 설득으로 산적한 경제현안들을 해결해 나갔다. 특히 경제장관회의는 낮일하는 시간을 피해 야간에 소집, 밤늦게까지 토의했다. 이와함께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의를 만들어 매월 대통령에게 경제동향을 보고함과 아울러 경제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결심을 유도해 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자도입을 서둘렀다. 수출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외자도입이라는 개발모델을 도입했다. 그리고 외자도입을 통해 정체상태에 있던 한국경제를 Take­off Stage(도약단계)에 진입시키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정부는 외자도입을 촉진키 위해 법제정비를 서둘렀다. 60년 제정된 외자도입 촉진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 차관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부 또는 은행지불보증을 받도록 했다. 자본재도입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제정했다(64년). 65년엔 과도한 외자도입에 따른 지불불능상태를 막기 위해 외채상환부담률이 9%를 초과하지 않도록 연차별 한도를 정했다(65년 한·미각서). 이어 66년엔 외자도입관계법령을 일원화, 단일 「외자도입법」을 제정, 지불보증제도의 정비와 함께 외국인투자비율제한을 없애고 1백%외국인투자를 허용, 도입절차도 간소화했다. 부실차관을 막기 위해 외자도입심의위원회를 설치, 외국인투자촉진을 위해 경제기획원안에 투자진흥관을 신설, 또 미국, 서독, 일본등 주요투자국에 해외주재 재무관을 설치, 선전·교섭·정보수집 및 전반적 유치활동을 하도록 했다. 일본에는 대일청구권자금사절단을 파견하고 기획원에는 청구권자금관리위원회를 두었다. 법제정비와 함께 차관선 물색에 나섰다. 먼저 대일차관도입을 촉진키위해 한·일경제각료회담을 개최키로 했다. 제1차 각료회담에서 한국측수석대표 장기영 부총리는 2차 5개년 계획(67∼71년)을 3년반으로 앞당겨 달성하겠다며 일본의 적극적 협력을 요청, 대일 청구권자금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그리고 민간차관 3억+α를 제공키로 합의했다. 정부는 외자도입의 대일편중을 막기 위해 미국과 경협을 확고히 하는 한편, 서독에도 눈을 돌려 경협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경제협력을 다변화하기 위해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를 설립했다. IECOK는 66년 5월 파리서 미·일·불·가·호·벨기에·이탈리아· 대만등 9개국이 회원국으로, 그리고 IBRD와 IMF가 옵서버로 참가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가졌다. 정부는 또 ADB(아시아개발은행)에 가입하고 IBRD, IFC 등 국제금융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해 나갔다. 또 월남파병에 따라 한·월경제각료 회담을 통해 달러획득과 국내송금이라는 외자수입소스를 개발했다. 한국의 외자도입은 미국원조가 감소하면서 시작됐다. 59년 동양시멘트가 시멘트 공장확장을 위해 2백13만9천달러의 DLF차관을 들여온것이 그 효시. 59∼69년까지 10년간 외자도입 실적은 총 6백44건 27억2천4백만달러였다. 그러나 64년까지 들어온 것은 모두 39건 8천5백만달러 남짓. 나머지는 모두 64∼69년사이에 들어왔다. 70년대 들어서는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외자도입 형태는 63년 미 걸프석유가 울산에 세운 대한석유공사(현 유공)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차관으로 들여왔다. 차관사업의 결정판은 포항종합제철이다. 한국정부는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67년 3월 미국, 영국, 서독, 이탈리아등 4개국 18개회사로 구성된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라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을 구성하고 그해 10월3일 포항현지에서 기공식까지 가졌으나 외자도입이 지지부진하자 대일청구권자금을 투입키로 방향을 전환, 무상·유상 일본수출입은차관등 1억6천8백만달러를 집중투입, 건설에 박차를 가해 오늘의 세계적 종합제철소로 키워냈다. 이밖에도 경부고속도로, 한전의 발전소, 통신시설 등 사회간접자본과 비료, 시멘트, 방직, 조선, 화학섬유, 원양어선, 석유화학 등 60년대 들어서는 주요산업이 모두 차관과 인연을 맺고 등장했다. 말썽많았던 한국비료와 신진자동차, 그리고 70년대에 건설한 중화학공업도 모두 차관사업이다. 외자도입은 한국경제가 도약단계를 이수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끊이지 않았다. 제일먼저 제기된것은 부실차관도입. 차관도입이 붐을 이루면서 될사업 안될사업을 마구 들여와 부실기업을 양산했다. 차관도입이 노다지 광맥으로 통하면서 그 도입과정에 별의별 희한한 탈법이 동원된 것이다. 내자없이 차관을 들여와 공장이 건설되자마자 부실화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도입액 절반이 행방불명돼 사업착수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원리금을 갚기 위한 현금차관이 말썽을 빚기도 했다. 외자도입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당시 한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소득이 낮으니까 저축이 낮고 저축이 낮으니까 투자가 낮고 투자가 없으면 생산­소득수준도 낮을 수 밖에 없는 빈곤의 악순환(R NURKSE)은 후진국 공통의 문제였다. 이런 악순환의 체인을 끊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자본도입­외자를 들여올 수 밖에 없었다. 외자로 수출산업을 건설하고 외자에 묻어들어온 기술로 건설된 공장을 가동시켰다. 정부는 수출산업을 일으키는데 외자를 집중투입했다. 처음에는 다른 개도국처럼 수입대체산업을 일으키려 했으나 협소한 국내시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되자 광대한 국제시장으로 진출하는 수출지향형공업화정책으로 전환해야 했다. 특히 수입대체산업에 대한 보호정책은 고평가된 환율, 무역 및 외환의 제한, 차별관세 저금리 등 안이한 정책을 불러와 도무지 수출을 늘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수출 산업건설과 함께 수출증대 시책이 광범하게 펼쳐졌다. 먼저 환율 현실화와 변동환율제를 도입했다. 정부는 64년 5월3일 환율현실화를 실시, 달러대 원화 환율을 달러당 1백30원에서 2백55원으로 인상했다(평가절하). 정부는 1년여 준비끝에 65년 3월22일 단일변동환율제를 시행했다. 이와 함께 수출지원체제를 정비했다. 수출목표제도를 도입, 연도별 월별 목표를 정해놓고 이를 달성토록 독려했다. 또 월례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두어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 전각료와 수출업계 대표등이 한자리에 모여 수출목표달성 여부를 점검하고 문제점이 제기되면 현장에서 해결책을 마련했다. 수출입 링크제의 폐지, 원자재 수입감면세 및 소모율 허용, 수입자유화 폭의 대폭적 확대가 이루어졌다. 특히 수입자유화를 위해 종래 수입허용방식을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에서 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으로 바꾸었는데 이에 따라 64년 6월까지 영이었던 수입자동승인품목이 64년 12월엔 수입허가 항목수의 8%, 65년 12월엔 62.7%로 확대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출독려를 위해 한국무역협회가 확대개편되었고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가 발족,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 수출마케팅과 정보수집에 나섰다. 관세제도의 개혁, 한국외환은행의 설립, GATT가입 등 개혁조치가 뒤를 이었다. 정부는 65년 9월30일 마침내 금리현실화를 단행했다. 금리현실화는 해방후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금기사항. 장부총리는 이 금기를 깨고 금리를 현실화했다. 가히 금리혁명이라 부를만했다. 현실화 내용은 예금금리를 연 15%에서 30%로, 대출금리를 24%(당좌대월 26%, 연체이자 36.5%)로 인상하는 역금리체제였다. 금리현실화는 시장자율화 정책의 일환으로 턱없이 낮은 은행금리를 대폭 인상한 것인데 주된 목적은 외자도입에 상응한 내자조달을 위한 것. 장부총리는 금리현실화의 목적은 경제적으로는 내자조달, 정치적으로는 금융의 이권화 배제, 사회적으로는 고리채 일소라고 역설했다. 정부는 개발인플레를 막기위해 종합물가안정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다. 장부총리는 물가안정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력하게 물가안정정책을 밀어 붙였다. 쌀값이 오르면 부총리가 미곡상을 불러 값인하를 종용하고 연탄값이 오르면 집하장에 뛰어가 원탄수송을 독려했다. 또 공납금, 철도요금, 쌀, 연탄, 채소, 시멘트, 커피, 목욕료, 버스료등 주요상품 및 서비스 요금을 모두 경제기획원 물가당국이 조정했다. 그가 목청높여 외치던 시장 자유정책과는 배치되는 행정력에의한 물가안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환율과 금리의 현실화, 무역자유화등 가격메커니즘의 현실화와 함께 재정안정계획 및 균형 예산을 통한 통화가치의 안정, 수출증대를 통한 외화획득의 극대화, 불요불급한 소비억제, 저축증대, 주유종탄 정책등 시장자유화에 기반을 둔 안정정책도 종합적으로 시행했다. 이런 종합적인 안정노력에 힘입어 65년부터는 경제성장률이 물가상승률을 웃도는 현상이 나타났다. 법과 제도의 개혁도 뒤따랐다. 세제개혁, 관세제도개혁을 비롯, 각종 법제(조선공업육성법, 전자공업진흥법, 철강공업육성법, 석유화학공업육성법 등)를 정비하고 국영기업 민영화, 농지소유상한제 철폐 등 개혁정책이 이어졌다. 이 모든 개혁조치들이 거의 동시에 종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장기영 부총리는 마침내 대분배정책을 내놓았다. 그는 67년 9월2일 재계간담회를 자청, 그동안의 성과를 토대로 10대분배정책을 제시했다. 공무원처우개선을 위한 세제개혁, 부동산양도소득세법 제정, 공공요금의 현실화, 공정거래법 제정, 무역자유화, 지방재정의 강화 인재등용등 광범한 개혁정책을 제시했다. 당시에는 혁명적이라할만큼 앞서가는 개혁정책이었지만 5∼20년후엔 대부분 실천에 옮겨졌다. 특히 인재등용원칙이 제기한 정실인사의 척결, 지방색 배제등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병을 벌써 30년전에 진단하고 처방을 내렸다. 그러나 대분배정책은 재계부담을 강요한 것이어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재계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게다가 그토록 그를 신임하던 대통령도 개발정책의 성공을 확인하고는 호흡조절을 위해 안전우선론자를 중심으로 새판을 짰다. 대분배정책을 제시한지 한달후의 일이었다. 대개혁가 장기영은 기성 질서를 사정없이 파괴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질서를 일구어 냈다. 그것은 창조적 파괴였다. 그는 부총리 재임기간중의 성과를 술회한 적이 있었다. 『재임 3년반은 우리경제의 Take­off 기간이었다. 수출은 1억달러 미만에서 3억달러로 늘었다. 저축은 4백억원에서 1천8백억원으로 증가했다. 정부보유달러는 1억달러에서 3억달러로, 물가는 도매 6%, 소비자 10%에서 안정되었다.』그의 개혁정책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한국의 수출주도형 성장정책, 외자도입에 의한 개발정책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60년대의 경제총수 장기영 부총리는 한국경제를 도약단계에 올려 놓았고 70년대의 경제총수 남덕우 부총리는 한국경제가 Take­off를 끝내고 성숙된 공업경제로 가는길을 열었다.<박병윤 본지편집인/정리=이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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