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노숙' 어제와 오늘] 서울역 르포

심야 역광장선 술판에 고성.욕설 이어져<br>"인력시장 일거리 없어" "추워지면 더 몰릴것"

2일 오전 1시께 서울역 앞 광장이 크게 술렁였다. 노숙자들끼리 한바탕 주먹질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젊은 노숙자가 부근을 순찰 중인 경찰관에게 뛰어간다. 그는 "연로하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 추석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아버지의 주민등록이 말소돼 집을 찾을 수가 없다. 삼촌 이름이 000이니 제발 집 좀 찾아달라"면서 울먹였다. 경찰은 수첩에 차근 차근 이름을 받아 적은 뒤 얼굴을 살피더니 "누구한테 맞았느냐"고 채근해 보지만 그는 "넘어져서 다친 것"이라며 상처난 얼굴을 손바닥으로가린다. 9월 들어 밤 공기가 선선해지자 심야의 서울역 앞 광장은 `노숙자 세상'으로 탈바꿈했다. 구(舊) 역사 근처에서만 10여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고성과 욕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크고 작은 소동이 잇따랐다. 역사 1층의 24시간 편의점은 소란을 틈 타 혹시 노숙자들이 물건을 훔쳐갈까봐아예 오전 2시께 가게문을 닫았다. 점원 김모(22)씨는 "한 개 팔려다 두 개 잃어버리면 점장한테 혼이 난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 노숙자가 "내가 선동렬 친구야"라며 엉성하게 투구자세를 취하다가 균형을 잃고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를 일으켜 세워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밤이 깊어질수록 길바닥은 점점 아수라장이 돼갔다. 빈 소주병과 종이컵, 컵라면 용기가 나뒹굴고, 오줌냄새가 진동한다. 노숙자들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었다. 남대문경찰서 서울역지구대 장준우 경사는 "알코올 중독이 심한 장기 노숙자들은 대부분 건강이 심각한 상태"라고 말했다. 일주일후 8일 새벽. 서울역의 밤공기는 꽤나 차가워져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오전 4시, 신(新)역사 2층 대합실로 들어서자 노숙자들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코를 찌른다. 불과 2시간 전에 대청소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대합실 중앙의 승객 대기용 의자는 잠든 노숙자들이 모조리 차지하고 있다. 여행용 가방을 끌고 대합실로 들어온 30대 여성 2명이 의자 근처를 한참 서성대다 결국 역사를 빠져나간다. 이들은 "빈 자리가 몇 개 있긴 했는데 주변 냄새를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첫기차가 올 때까지 근처 식당에 가 있기로 했다"고 말했다. 3번 출입구 근처 사물보관함과 흡연실 앞에는 40여명의 노숙자들이 신발을 베개삼아 누워있다. "요즘 신발 도둑이 기승을 부린다"고 한 노숙자가 귀띔했다. 출입이 금지된 3층 대합실도 2층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철도공안이나 공익근무요원의 `방해' 없이 단잠을 즐기는 모습이다. 이날 서울역 2, 3층 대합실에서 잠든 노숙자는 200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역사 내의 `특수 벤치'도 노숙자들에겐 거저 이용할 수 있는 침상이다. 서울역의 3인용 벤치에는 거리의 일반 벤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10㎝ 높이의 팔걸이 2개가 중간에 붙어 있다. 노숙자들이 누워 자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란다. 노숙자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벤치 두 개를 나란히 붙여서 그 사이에서 새우잠을 청하거나, 아예 세로방향으로 벤치 네댓 개를 이어 침대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서울역 앞 남대문경찰서 방향 지하도 안에서는 한 여성 노숙자가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듯 인기척이 있을 때마다깜짝 놀라 눈을 떴다. 열린여성센터 서정화 소장은 "거리노숙 여성의 경우 앞니가 빠진 경우를 종종볼 수 있다"면서 남성 노숙자나 술취한 행인들이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갑자기 지하도 계단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술에 취한 한 노숙자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신음하고 있다. 첫 기차가 출발하는 오전 5시반. 철도공사 직원과 공안, 공익근무요원들이 함께역사내 노숙자들을 일제히 깨워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한다. 잠이 덜 깬 노숙자들도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노숙자들이 15분 가량 걸어 도착한 곳은 남대문로 5가 YTN 빌딩 앞 지하도. 한종교단체에서 무료급식을 실시하고 있었다. 5열 종대로 서서 배식을 기다리는 노숙자들이 150명 남짓 돼 보인다. 콩나물국밥에 김치가 전부다. 입맛에 맞지 않은 지들고 있는 가방에서 꺼낸 고춧가루를 쳐서 먹는 노숙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근처 인력시장에는 식사를 마친 노숙자 7∼8명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제법 건장한 30대의 `운좋은' 노숙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허탕을 쳤다. 서울역으로 돌아온 이들은 이른아침 시간인데도 한데 모여 강소주를 주고받았다. 한 40대 노숙자는 "예전에는 봉고차가 와서 한꺼번에 몇 명씩 싣고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일거리를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술자리를 지켜보던 서울역 관계자는 "요즘은 그나마 날씨가 춥지않아 시내 곳곳에 분산돼 있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서울역사와 인근 지하철구내로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더 왁자지??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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