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1부. 법·질서부터 바로잡아라] <4> 지방자치 제대로 하자

곳간 바닥난 지자체, 돈줄 쥔 중앙정부에 목매 '무늬만 자치'<br>지방세수 주는데 국고사업비 부담은 늘어<br>재정자립 악화… 주민위한 사업 엄두 못내<br>국세-지방세 비율 조정·지방 분권 강화를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1월31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전국 시도지사협의회 간담회에서 시도지사들과 국토균형발전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올해로 지방자치가 실시된 지 23년째를 맞고 있지만 예산이 중앙정부에 예속돼 있어 무늬만 자치가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제공=시도지사협의회


"지방자치는 죽었습니다. 시ㆍ군ㆍ구 같은 지방자치단체는 차라리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의 보조기구로 이름을 바꾸는 게 맞아요."

서울시 은평구의 올해 예산은 3,979억원. 이 가운데 구청장이 주민들을 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얼마나 될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한 푼도 없다. 이성우 은평구 기획예산과장은 "예산 가운데 55%는 국고보조사업을 위한 매칭 비용으로 써야 하고 인건비나 기본 시설 운영비 등을 집행하면 남는 돈은커녕 오히려 부족하다"며 "이런 상황이라면 지방선거 때 구청장 후보들이 사업 공약을 내는 게 무의미하다"고 토로했다.


은평구는 집 앞 도로가 망가져도 당장 보수할 돈이 없다. 여름철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 하수도에 쌓인 흙도 파내야 하지만 이 역시 시늉만 낼 수 있을 뿐이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자원회수시설 예산은 4분의3 밖에 확보하지 못해 서울시의 지원 없이는 올 하반기 가동을 중단해야 할 형편이다.

그나마 은평구는 인건비만큼은 확보한 터라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지난해 지방세 수입만으로 자치단체의 인건비도 못 주는 곳은 전체의 절반인 123곳에 달했다. 대다수 지자체들은 극심한 재정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정부와 광역단체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1991년 지방의회제도의 부활과 함께 지방자치제도를 다시 시행한 지 올해로 23년째다. 내년이면 벌써 6기 지자체장이 나오지만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이처럼 예산에 발목을 잡힌 채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산을 걷고 쓰는 과정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현재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거둬들이는 세금의 비중은 8대2로 중앙에 압도적으로 쏠린다. 그러나 실제 비용 집행은 지자체가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때문에 항상 자금이 부족한 지자체는 '을(乙)'의 입장에서 돈줄을 쥔 '갑(甲)' 정부 눈치를 보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예산을 받아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한 지자체 예산실무자는 "자체 예산이 부족하니 새로운 사업을 진행할 수도 없고 몇 년에 걸쳐 추진하는 사업도 교부금이 필요한 만큼 제대로 나오는지 목을 빼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부동산 경기 침체와 중앙정부의 감세정책으로 지방세 수입이 줄어든 터라 정부의 복지사업 확대에 따른 국고보조사업 비용 지출이 늘어난 점은 지자체의 살림살이를 더욱 궁핍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무상보육을 비롯한 기초생활급여ㆍ기초노령연금 등 사회복지사업은 모두 정부가 주도하지만 실제 예산집행은 지자체에서 맡는다. 국가는 정책을 만든 뒤 지자체에 국고보조금을 일부만 지급한다. 지자체는 나머지 부족한 부분을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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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보조사업은 2006년 26조2,000억원에서 2012년 52조6,000억원으로 연평균 12.4%씩 늘어났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 내려주는 국고보조금은 같은 기간 18조3,300억원에서 32조600억원으로 연평균 9.8% 증가하는 데 그쳤다. 결국 지자체가 빈틈을 메우기 위해 매년 17.5%씩 지방비를 더 투입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 2001년 57.6%를 기록했던 지방재정 자립도는 2005년 56.2%, 2012년 52.3%로 갈수록 떨어졌다. 지자체는 겉으로는 세수감소, 안으로는 국고보조사업비 마련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늬만 '자치단체'로 전락한 것이다.

한 기초자치단체 관계자는 "국가나 광역단체가 파악하지 못하는 지역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최선의 행정 서비스를 펼치기 위해 지방자치가 도입된 것 아니냐"며 "동네 도로 복구도 바로 못하는 게 자치구의 현실"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뒷걸음질 치는 지방자치제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재정문제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인명 한국지방재정학회장은 "이번 정부에서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이 최소한 7대3까지는 조정해야 실질적인 지방자치를 실시하기 위한 여건이 마련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방세 비율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는 부가가치세 중 지방소비세 비중 상향조정이나 경마장 등 특정장소나 유흥업소 입장 등 지역성이 강한 소비세를 국세에서 지방세로 바꾸는 방법 등이 거론된다. 특히 복지사업 가운데 정부 정책에 따라 시행되는 사업의 국고보조율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아울러 자치경찰제 도입과 교육자치 등 지방정부에 권한을 떼어주고 조례입법권을 확대해 실질적으로 지자체가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지자체와 학자들의 의견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국정과제에 ▦지역균형발전 ▦지방재정 확충 및 건전성 강화 ▦지방분권 강화 등을 포함시켰다. 때문에 지자체들은 박 대통령이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지방분권을 추진할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성호 전국시도지사협의회 정책연구실장은 "과거 대통령들도 집권 초기에는 지방분권의 의지가 강했지만 중앙부처의 반대나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패배 등을 겪고 나면 의지가 약화되는 경우가 반복됐다"며 "통치권자의 강한 의지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자체들이 더 많은 권한을 갖기 위해서는 예산 집행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경기도 성남시나 용인시처럼 호화청사를 짓거나 주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다 혈세를 낭비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조임곤 경기대 교수는 "일본 유바리시는 무리하게 관광사업을 추진하다 2006년 파산하는 등 방만한 지방재정운용이 자치단체의 존폐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며 "지방재정 감독을 강화할 수 있는 선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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