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모여 역사가 되고, 자료가 쌓여 사료가 됩니다. 제가 모은 문헌들이 한국미술에 대한 자료인 동시에 젊은 학자들을 위한 연구 기반이 되기를 바라 기증했습니다."
미술사학이자 평론가인 최열(56ㆍ사진)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이 입을 열었다. 최근 그는 지난 20여 년간 모은 한국 근ㆍ현대미술사 연구 문헌 전량을 남모르게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사료는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50년간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거의 모든 미술 기사를 모은 것으로 분량은 1만5,000~2만 건에 이른다. 여기에는 1980년대 민중미술과 관련한 현장 전단지ㆍ대자보ㆍ판화ㆍ도록ㆍ사진 등 한국현대미술운동사 자료 2,000건도 포함됐다.
공들인 시간만 20년이 넘는다. 최 실장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흐름을 총정리 한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 1800~1945'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 1945~1961'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문헌 연구를 시작했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은 물론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근대미술 자료들을 찾아 도서관, 언론사 등지를 돌아다녔다. 최 실장은 "속독으로 지그재그식으로 훑은 다음 'ㄹ'자로 읽으며 자료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며 "일제시대 잡지는 글씨 상당부분이 일그러져 있었고 마이크로필름본은 글씨가 너무 작아 10장쯤 돌려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친일 조선미술가협회 등의 민감한 자료들이 검열상의 이유로 찢겨 있었던 것은 안타까웠지만 미술계가 주목하지 않았던 작가ㆍ단체의 활동을 발굴했을 때는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기증한 이유에 대해 최 실장은 "사료들을 영인본으로 만들어 다른 연구자들에게 나눠주려고 했는데 힘에 부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그 일을 떠맡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사라지면 20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이 흩어져 휴지가 될까 걱정이었는데 이제 후련하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자료들은 미술관 학예연구팀에서 분류작업 중이다. 장엽 학예연구2팀장은 "목록화에서 디지털화까지 3~4년이 걸릴 정도로 방대한 양의 자료"라며 "연구가치가 높은 기초 사료일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미술 연구센터(가칭) 구축에 필요한 인프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