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쇠락해 외국 자본에, 후발 은행에 팔리는 처지이지만 외환은행(KEB)은 한때 가장 잘나가는 곳이었다. 외국환 전문 국책은행으로 탄생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글로벌뱅크로 뿌리를 내렸고 지금도 가장 광대한 영업망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KEB맨의 자존심은 어떤 은행보다 강했다.
외환은행의 후배들이 계속된 인수합병(M&A)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힘을 잃지 않고 능력을 발현하는 것은 선배들에 대한 존경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경쟁 은행들이 하나와 외환의 하나 됨을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은행의 역동성과 외환은행의 글로벌 능력이 힘을 합했을 때의 시너지 때문만 아니라 'KEB맨의 부활'이 가져올 그림을 잘 알고 있어서다. 하지만 아무리 출중한 능력이라도 때를 놓치면 그저 그런 사물이 되고 마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특히 기업의 전략적 승부에서 타이밍은 생명이다. '골든타임'이라는 말이 유행가처럼 범람하지만 '핀테크'가 금융의 중심에 선 작금의 상황에서 '속도'는 금융사에 제1의 기준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외환은행은 지금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고 이는 하나금융 전체의 힘을 갉아먹고 있다. 우리은행 민영화가 다시 불발되고 KB의 새 선장이 된 윤종규 회장이 전열을 재정비하느라 본격적으로 탄력을 가하고 있지 않은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마저도 다음달이면 확연하게 달라질 것이 자명하다.
명분 없는 합병 지연, 여론 등돌려
사실 M&A는 기업 입장에서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엄청난 시너지를 발현하지만 잘못 쓰면 기업 자체를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독이다. 금호와 STX·웅진 등이 '승자의 저주'에 빠져 무너진 것은 단순히 M&A에 따른 과도한 빚을 감당 못 해서가 아니다. 인수 회사의 문화와 조직원들을 제대로 융합시키지 못하면서 조직 전체가 모래성이 된 것이 더 큰 이유다. 이 때문에 M&A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수 회사와 피인수회사 조직원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이 조기 통합 선언 이후 6개월 넘게 외환 노조와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조직 전반의 갈등 요인을 하나라도 더 제거하기 위함이다. 외환 노조 집행부는 지금까지 벌인 사측과의 싸움에서 결코 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거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도 조기 합병의 전제 조건이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사측의 양보를 최대한 얻어냈다.
물론 노조 집행부 입장에서는 티끌만큼이라도 더 얻어내 조합원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것이다. 사라지는 회사의 마지막 집행부로 조직원들에게 도리를 다하고 싶은 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모든 협상은 '게임'이고 '딜'이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명분을 갖춰야 하고 큰 게임일수록 여론을 등에 업어야 한다. 사측이 6개월이나 노조와 머리를 맞댄 것은 노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늦더라도 여론과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사측은 노조의 입장을 추가로 들어줄 경우 노조가 아닌, 국민으로부터 '바보 경영진'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경영진 역시 '외통수'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금융당국이 조기 통합의 승인을 미뤄가면서 노사 합의를 기다린 것 역시 여론이 그들의 정책적 판단에 지지를 해줄 타이밍을 찾기 위함이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12일 국회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노사 합의 없는 통합 신청 처리를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자신의 정책 판단에 대해 여론이 지지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췄다는 얘기다. 이는 거꾸로 외환 노조가 더 얻어내겠다고 시간을 끌 경우 여론의 싸늘함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자 지금까지 얻어냈던 것들조차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사 합의 타결 KEB 부활 힘써야
모든 회사가 마찬가지이지만 노조 집행부의 가장 큰 무기이자 생명력은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는 데 있다. 노조 집행부가 '권력욕'을 위해 협상을 한다는 말이 단 0.1%의 조합원의 입에서라도 나온다면 그 집행부는 협상 기술에서 치명적 오류를 범했음을 의미한다. 외환 노조는 그런 소리가 지금 들리기 시작하지는 않는지 사방을 둘러봐야 한다. 노조 집행부는 그런 의미에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애써 귀를 막고 싶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늦으면 그들이 갖고 있던 마지막 명분마저 뺏길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부디 기회를 날리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