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홍현종의 경제 프리즘] 피흘리는 유럽


유럽연합(EU) 회원국이면서도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있는 3개국-영국 그리고 스웨덴과 덴마크다. 먼저 영국. 지난 1999년 1월 유로 발족 당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은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영국이 통화 통합에 당장 참가하지 않아도 런던은 유로 거래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경제 조건에서 큰 차이가 나는 영국과 대륙 각국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영국은 유로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 유로 거래 환율이 런던 외환시장에서 결정되는 한 영국으로서는 혼란이 예상되는 통화 통합과정에 굳이 서둘러 참여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실리는 챙겨 나가겠다는 계산이 깔린 얘기다. 게다가 내심 영국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자부심 높은 파운드화가 없어진다는 일을 참아내기 어려웠는 지도 모를 일이다. 스웨덴과 덴마크. EU권 전체가 경기 부진에 허덕이고 있음에도 알짜배기 성장을 하고 있는 북부 유럽국가들이다. 유로화 도입을 두고 두 차례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모두 부결됐다. 유연한 노동시장에 대기업들의 기술력 등 경제 펀더멘틀이 튼튼한 데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주변을 앞 마당처럼 쓰고 있는 상황에 굳이 유로화로 갈아타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여유가 있는 나라들부터 이렇듯 자국 이기주의를 고집하는 상황 속에서 유럽 통합이 원활히 이뤄질 것이란 기대는 애초부터 무리였는 지도 모른다. ▦이달 초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의 유럽 헌법 부결에 따른 후유증에 EU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유로 대열을 이탈하겠다는 소리가 나오더니 마침내 지난주말 EU정상회의에서는 중기 예산안을 두고 극단적인 자국 이기주의가 부딪히며 꼴 사나운 모양새를 연출했다. 유럽헌법 비준 중단 사태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던 통합 화폐 유로의 존속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경제에도 태풍의 눈이 되고 있다. 혼란의 상황 속에 “EU 헌법 부결은 영국의 승리” 라고 말한 이코노미스트 최근호의 보도는 묘한 뉴앙스를 남긴다. 잡지는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이 통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는 것. 어쨌든 통화통합에 참여하지 않던 영국에게 유로 위기는 상대적으로 초조할 게 없는 일일 수 있다. 그 배짱이 EU정상회의에서도 다른 회원국들과 마찰을 빚으며 예산안 환급을 포기하지 않고 협상을 결렬 시킨 결과로 나타났다. ▦유로화와 관련한 유럽의 사태를 보는 아시아 경제권의 이해관계는 어떨까. 중국은 지난 1998년 당시 주릉지 총리가 미국의 일극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외화 준비를 유로로 바꾼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은 외화 준비금의 유로 비중을 높이려는 노력을 해왔다. 무엇보다 달러의 독주를 의식해서다. 최근 들어 사사건건 미국과 갈등을 보이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유로화 추락은 결코 ‘굿뉴스’가 아니다. 미국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는 일본도 적어도 통화에서만큼은 달러 일극 체제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아시아 통화 위기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각국 통화가 달러에만 연동돼있는 지금 같은 체제는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자국 통화인 엔의 위상 제고를 의식, 유로를 전략적으로 이용해온 측면이 강하다. 유로 통합 지연과 그에 따른 유로화 약세는 국제경제계에 여러 지형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유럽연합 사망”-이 같은 제목과 함께 피 흘리는 유럽을 표지로 그린 이코노미스트 최신호. 국제금융시장의 급격한 변화로 ‘쓴 맛’을 본 우리에게는 어쩐지 섬뜩한 전조(前兆)처럼 비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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