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29일] 콜베르


수입 억제와 수출 장려,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발전. ‘짐이 곧 국가’라고 말했던 프랑스 루이 14세 치하에서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주도한 경제정책의 골자다. 1619년 8월29일 스코틀랜드계 직물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콜베르는 예수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은행과 육군성에 근무하며 인맥을 넓혀나갔다. 본격적인 출세가도에 들어선 것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렸던 루이 14세의 눈에 들면서부터. 유력 귀족의 은닉재산을 찾아내 어린 국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46세에 재무총감에 오른 뒤 해군성과 식민성 장관 자리까지 꿰찼다. 국정 전반을 장악한 그는 ‘산업의 중앙집권화’을 꾀했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고율의 관세를 매기고 외국 기술자를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중상(重商)주의자로 기억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세제개혁으로 국고 수입도 크게 늘렸다. 덕분에 적자였던 재정이 연간 1억 리브르 흑자로 돌아섰다. 문제는 경직성. 재정흑자의 70%가 전쟁 비용, 6%가 국왕의 사치 비용으로 들어가고 경제에 재투자된 재원은 1%에도 못 미쳤다. 중앙통제식 경제도 초기에만 반짝했을 뿐 갈수록 산업경쟁력을 깎아먹었다. 그의 사망(1683년ㆍ62세) 이후에는 부작용이 더욱 불거졌다.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이 세제개혁을 되돌린데다 국왕 루이 14세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낭트 칙령’을 폐지(1685년)해 신교도 기술자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결과는 재정악화를 넘어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주도권도 영국에 빼앗겼다. 콜베르의 극단적 중상주의는 제국주의를 거쳐 보호무역과 근린궁핍화정책(이웃 나라를 희생시켜야 잘산다는 이론)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무능한 통치자와 중앙통제 관습, 종교적 편향성도 남의 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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