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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산책] 오색 비단 속에 감춰진 왕의 사랑


아름드리 나무가 무성한 창경궁 길을 걷노라면 북동쪽의 높은 동산과 남서쪽의 나지막한 동산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한 낙선재(樂善齋)ㆍ석복헌(錫福軒)ㆍ수강재(壽康齋)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헌종(1827~1849)이 계비(繼妃)를 간택하면서부터 후사를 보아 선조에 효도하고 나라를 평안히 다스리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헌종은 4세에 부친 효명세자를 여의고 왕세손으로 책봉됐다 여덟살에 할아버지 순조(1834)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했고, 어린 왕을 대신해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7년간 친정을 했다. 정실 왕비로서는 150년만에 세자를 낳았던 순원왕후의 손자 사랑은 각별했다.


헌종, 경빈 김씨에 대한 사랑 각별

헌종의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1844년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계비를 간택했다. 당시 궁인들에 따르면 헌종은 후일 경빈이 된 김씨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순원황후 등의 의견에 따라 홍씨를 새 왕비(효정왕후)로 맞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후손이 없자 1847년 마음에 품었던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가례도감을 설치, 국혼과 대등한 절차에 따라 경빈(慶嬪)이라는 작호(爵號)와 순화(順和)라는 궁호(宮號)를 내렸다. 가례에 관한 문서도 화려한 오색 비단에 필사본으로 전해져 헌종의 사랑과 정성이 깊게 느껴진다. 화려한 비단으로 표지를 꾸민 한글본 '뎡미가례시일긔(丁未嘉禮時日記)'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왕후의 가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헌종은 1848년 석복헌을 지으면서 그 옆에 있던 수강재(壽康齋)를 중수(重修)해 육순을 맞은 순원왕후가 머물렀다. 경빈 김씨와 후사의 권위ㆍ정통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헌종은 경빈을 맞은 지 두 해도 넘기지 못하고 2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왕이 승하하면 후궁은 사궁(私宮)으로 나가야 하는 관례에 따라 경빈은 궁궐 밖 순화궁(順和宮)에 살며 한 많은 빈(嬪ㆍ후궁에게 내리던 정일품 내명부 품계)의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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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는 비록 주인의 오랜 기거는 없었으나 주인의 애틋한 감정과 경건한 의식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오늘날 한글 서예, 특히 궁체의 온상지로 꼽을 만하다. 헌종은 책을 좋아하고 서화에 관심이 많아 이곳에 많은 장서를 구비했다.

'한글 궁체의 백미'도 여기서 탄생

또한 할머니 순원왕후는 많은 한글 편지를 남겼으며,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돼 입궁할 때 몸종으로 함께 들어온 이씨는 '한글 궁체의 제일가는 명필'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한글 궁체의 백미로 꼽히는 '뎡미가례시일긔'와 '순화궁 첩초(帖草)' 같이 미려한 서체가 생겨난 원천이다. 특히 '뎡미가례시일긔'의 한글 서체는 새하얀 초주지(草注紙)에 새긴 한 점 한 획마다 우리 고유의 문자를 미적으로 승화시킨 문자미(文字美)의 결정체다. 2002년 문화관광부에서 '100대 한글문화유산'의 하나로 선정함으로써 지난날 왕의 마음을 담고자 정성을 기울인 공경이 다시금 우러나 빛바랜 비단 위에 왕의 사랑이 또렷한 먹빛으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오늘날 사랑을 전하는 이들은 무엇으로 그 자취를 남기는지…. 공원 난간에 매어놓은 수많은 자물쇠가 사랑의 정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그 사랑의 관념이 메마르게 느껴진다. 언어의 표현이 아닌 이심전심도 있다지만 어디 먹빛의 깊이 만큼 하겠는가. 붉은 노을 단풍지는 계절에 임을 그리는 사랑의 감정을 담백한 먹빛으로 화선지에 번져내는 그대 모습이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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