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첫 단계인 '회합 민주주의'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중동의 고대국가에서 시작해 이후 동서 여러 고대 문명권으로 퍼졌다. 이후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급부상하며 '대의 민주주의' 형태를 발전시켰고 최근 형태인 '모니터 민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인도의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간 대부분의 생각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돼 유럽을 거쳐 기타지역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비서구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오리지널'이 아닌 B급 취급을 받았고, 맹목적으로 서구의 개념을 들여오고 그들의 잣대로 비서구를 평가해왔다. 킨 역시 책의 대부분은 서구 민주주의에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민주화의 역사에서 비서구권의 영향은 생각처럼 적지 않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서구나 비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접근한다. 민주주의는 인류 공통의 기원이 있고, 여러 문명에서 나름의 특징을 드러내며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서구 민주주의는 동양의 민주주의보다 오늘날 잘 제도화되고 안정돼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하지 않으며 이는 서구가 최근 200여 년 식민지 건설 등 폭력적 방법을 통해 축적한 물질적 기반 위에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21세기 들어 서구의 민주주의는 정체상태를 이어가는 반면, 비서구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1960~1980년대 유행한 종속이론(제 3세계론)이 규정했던 세계관은 제2세계(소련과 동맹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로 근거 자체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매운 신자유주의적 세계관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 가운데 중국과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 이란·이집트 등 아프리카와 중동을 포괄하는 이슬람권, 브라질 등 남미에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동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비서구는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였다. 자본이 아닌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주의의 관철, 국제평화를 위한 실효적인 장치 마련, 성장논리에서 환경을 보호하는 것, 세계화 속 외래 거주자의 권리 등 근본적인 민주주의 과제에서 더 진취적인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언급했듯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 참여예산제도와 보우사 파밀리아, 인도의 판차야트개혁과 케랄라주 시민플랜, 중국 농민들이 만들어낸 향촌단위 촌민위원회와 시민의회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무한성장보다 자연의 권리를 택한 '부엔 비비스(좋은 삶)', 군대 없는 나라를 선택한 코스타리카, 힌두·이슬람권의 수많은 상향식 합의체 기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서구와 비서구라는 거대한 분할 선이 점차 가늘어지고 희박해지는 방향으로 역사가 이동하고 있음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