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대권을 잡아라 선택2002] 李후보 부인 한인옥여사

"初心돌아가 최선 다할뿐"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내조를 맡고 있는 한인옥 여사의 심정은 담담했다. 남편이 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왔으나 청와대에 가고 안가고는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게 한여사의 믿음이다. 16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정작 이후보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한여사를 8일 만나봤다. - 결전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초조하실텐데. ▲ 솔직히 말씀드려 참 어렵습니다. 두번째라 쉽지 않겠느냐는 말도 듣지만 모르는 소리예요. 요즘은 초심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5년 동안이나 절치부심하며 열심히 해왔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의 권익향상이 아직도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신지요. ▲척박한 시대를 살아온 한 여성으로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회 곳곳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해야 여성의 시각과 관점이 고루 반영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 할당제를 해서라도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들의 수를 늘리고 또 여성들이 사회에 나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도록 보육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후보가 당선되면 여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평소 여사의 성격이 강하다는 평판과 무관치 않은 것 같은데요. ▲저희 내외는 서로의 역할 구분이 뚜렷합니다. 남편이 집안 일을 저에게 믿고 맡긴 만큼, 저 또한 바깥 일에 대해서는 남편이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었고, 지금도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 복지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올초 가평에 있는 꽃마을에서 임종을 앞둔 노인을 씻겨주고 살피는 봉 사를 했는데 그 때 느낀 바가 참 많았습니다.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을 위해 노인시설과 병원을 늘리고 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기양건설 비자금이 한여사를 통해 후보에게 전달됐다는 주장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지난 5년 간 검증을 충분히 받지 않았습니까? 국민들께서도 더 이상 안 믿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전과 7범의 사람에게 제가 돈을 받았다고 꾸미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 이후보에 대해서는 '엘리트' ,'귀족' 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여사께서 이후보에게 특별히 주문하시는 게 있습니까. ▲결코 그런 분이 아닌데 주변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니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30년 넘게 법관이라는 직업에 몸담고 있다보니 감정을 절제하고 표현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엄숙한 표정이 다소 근엄하고 딱딱하게 비춰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이 웃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 바람직한 영부인상은 어떤 것이라고 봅니까. 아울러 경쟁자인 노후보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대통령이 국정을 잘 돌보도록 가족 문제 등 최대한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영부인이 우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여사에게) 요즘 고생 많으시죠. 정치인의 아내로 남편을 위해 열심히 돕고 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끼고, 밖에서 마주치는 경우에도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선거를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힘내세요. - 요리를 잘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신있는 요리는 무엇입니까. 또 기억에 남는 부부싸움을 소개해주신다면. ▲저희 집은 일년에 한 차례씩 장을 담그는데 언젠가 남편이 된장찌개 만큼은 당신이 끓인 게 최고라며 칭찬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 된장과 청국장을 함께 갈아넣는다는 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신혼 초에 찬장 때문에 다투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친정 어머니의 도움으로 '호마이카 찬장'을 구입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찬장을 보고는 앞으로 꾸려나가야 할 살림이 얼마나 많은데 찬장 하나 사는 것까지 처가의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느냐며 저를 막 나무라는 겁니다. 막상 그 때는 참 야속하고 서운했습니다. 그래도 성북동, 휘경동을 거쳐 이문동을 떠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썼으니 지금은 남편도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만히 웃습니다. 박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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