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9일] 게일 보든


쫄딱 망한 50대 사내, 게일 보든 2세(Gail Borden Jr). 미국 낙농산업이 그로부터 시작됐다. 젊었을 때는 미국이 텍사스 땅을 얻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1801년 뉴욕에서 마차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청년기까지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며 자랐다. 병약했던 탓이다. 따뜻한 남부로 보내져 6년 반을 휴양하는 동안 보든은 건강도 찾고 독학으로 측량기술도 배웠다. 측량으로 돈을 모아 여의도의 두 배가 넘는 땅을 사들여 농장주의 꿈을 키워가며 지역 신문사도 운영하던 30대 중반의 그가 유명해진 것은 1836년. 멕시코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미국인들이 알라모 요새에서 옥쇄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했기 때문이다. 론스타공화국에서 독립한 텍사스의 세관장 자리를 받은 보든은 공무원 월급으로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발명에 나섰다. 첫 발명품이 쇠고기 육즙과 밀가루를 섞은 고기 비스킷. 1851년 열린 런던국제박람회에서 호평을 얻었지만 과잉 투자로 사업은 곧 망하고 말았다. 나이 51세에 전재산을 날린 보든은 농축우유에 눈을 돌렸다. 런던박람회에서 돌아오는 배편에서 여객선에 실은 젖소가 멀미를 하는 통에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들이 굶주렸던 광경을 떠올려 2년간의 연구 끝에 농축우유, 즉 연유를 개발해냈다. 특허분쟁과 첫 공장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사업을 영위한 그에게 남북전쟁이 거대한 수요를 안겨줬다. 종전 후에도 연유에 맛 들린 북군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입소문을 낸 덕에 더 큰 돈을 벌고 1874년 백만장자로 죽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세계 최대의 유제품회사로 군림하던 보든의 회사는 브랜드 남발로 1994년 매각됐지만 보든의 이름은 아직도 제품군 속에 살아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던 덕분이다. 중년에게도 기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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