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가 유고(有故) 중이면 전투가 되겠습니까. 주인이 없으면 몇백억원 이상 들어가는 투자 결정을 절대 하지 못합니다. 삼성이 세계 반도체 1위 업체가 된 것은 무리라는 경영진의 반대에도 과감한 결단을 내린 고(故) 이병철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김영배(사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직무대행은 최근 서울 마포구의 경총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기업인 사면과 투자확대는 자연스럽게 연계된 문제"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 2월 말 이희범 전 회장의 뒤를 이어 경총을 이끌고 있는 김 대행이 언론 인터뷰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행이라는 자리가 그만큼 조심스럽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 대행이 생각하는 오너 리더십이란 "내가 책임질 테니 한번 해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최고결정권자의 과감한 모험정신이다. 살아생전 "해봤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만큼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를 자랑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일화가 자연히 떠오른다.
김 대행은 "오너 1세대가 있었을 때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속도가 가장 빨랐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모든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오너 리더십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배임죄가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독일과 한국·일본뿐"이라며 "회사의 생존경쟁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실수나 잘못을 관대하게 용인하고 선처해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 처럼 배임죄 등으로 옥중에 있는 기업인들이 하루빨리 경영전선에 복귀해야 투자가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도 함께 날아오를 수 있음을 에둘러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행은 특히 "사업의 리스크를 법과 제도가 보호해줘야 기업이 성장한다"며 "법의 잣대가 지나치게 엄격해지면서 벤처정신은 사라지고 '돈 있으면 안전하게 가자'는 풍조만 남아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 "외환위기 당시 400%가 넘던 한국의 부채 비율이 지금은 92%로 떨어졌다"며 "안정됐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투자 분위기가 위축돼 있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줄줄이 실적부진의 늪을 헤매고 있는 국내 제조업에 대한 걱정도 토로했다. "미국과 중국이 잘되면 우리도 같이 살아나는 보완관계가 형성돼야 하는데 지금은 대체관계가 굳어지고 있어 제조업의 돌파구가 잘 안 보인다"는 것이 김 대행의 진단이다.
그는 "일자리가 많이 필요한 산업은 중국보다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며 "앞으로는 서비스업이나 제약·바이오 등의 초기술집약적 산업에서 틈새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대행과의 대화는 통상임금과 사내하도급 등 오랜 시간 노동시장을 들쑤셔온 대형 이슈들에 대한 주제로 옮아갔다. 그는 현대차의 사내하도급을 불법파견으로 본 판결과 산업계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관련법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실제 수요가 가장 큰 제조업 분야에서 파견이 금지되는 등 선진국에 비해 노동규제가 과도합니다. 최근 판결을 두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사내하도급=불법파견'이라는 단편적 사고는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독일·일본 등 상당수 선진국과 달리 파견이 가능한 업종이 32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조선·철강·자동차 등 파견이 불가능한 제조업종 회사들은 그동안 사내하도급으로 인력운용의 효율성을 높여왔다. 원청과 하청회사 가운데 근로지휘 감독권을 누가 가졌느냐에 따라 파견과 사내하도급이 구분된다. 이런 제도적인 문제 속에 지난달 현대차의 사내하청 활용은 불법파견이며 해당 근로자는 정규직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사내하도급 문제가 산업계의 이슈로 다시 부상했다.
김 대행은 "사내하도급은 우리 기업이 경쟁력 유지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며 "이에 대한 규제는 고용시장 전체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도급계약의 규율범위 안에서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하고 협력업체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원청이 계약해지권 등을 남발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만큼 원청·하청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고용안정과 인력운용의 효율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얘기다.
그는 아직 노사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는 통상임금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관련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채 노사합의와 개별소송에 의존하면서 통상임금을 둘러싼 각종 혼란이 수그러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행은 "임금을 올리기 위해 정기상여금이면 무조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며 "불확실한 추가 임금청구 소송에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기보다는 노사가 미래지향적인 임금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는 현대차처럼 임금협상은 마무리하고 통상임금만 분리해 따로 논의하는 것도 노사안정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수년째 치열한 논의를 거듭해온 근로시간 단축 역시 김 대행과 경총의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통상임금과 사내하도급 문제만큼 재계와 노동계가 극렬한 입장대치를 보이는 이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김 대행의 목소리 톤도 한층 높아졌다.
그는 "휴일근로가 연장근로에 포함되면 현재 주당 52시간을 초과해 근무하는 근로자 비율이 30%가 넘는 자동차·금속·식품 등의 주요 제조업을 중심으로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특히 지불능력도 부족하고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다수 중소기업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근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현재 일주일에 최대 68시간(법정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휴일근로 16시간)까지 가능한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되 노사 합의가 있을 경우 주 8시간의 추가 연장근로를 허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노동계는 기업의 입장을 감안한 '후퇴한 법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김 대행 역시 다른 이유로 이 개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기업규모별 단계적 시행, 추가 연장근로 허용 등 기업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하나 이는 근본적인 대응책이 아닐뿐더러 실효성도 없다"며 "단시간에 근로시간을 큰 폭으로 줄이면 기업의 물량감소는 물론 임금삭감을 둘러싼 노사 간 갈등증폭도 불 보듯 뻔하다"고 비판했다. 주제가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핵심 과제로 꼽히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흘러가자 김 대행의 얼굴에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했다. 김 대행은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남성 위주의 외벌이 소득구조를 개선해 육아기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일자리라 기업과 근로자 모두 과도기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10대그룹이 총 6,700명의 시간선택제 채용을 완료하는 등 기업들도 의욕을 보이고 있으나 정부의 목표에는 크게 못 미치는 상황이다.
그는 "기업이 어렵게 직무를 발굴해도 채용 후 이탈률이 높은 실정"이라며 "시간선택제의 특성상 임금수준이 낮은 것은 당연한데 이를 질 낮은 일자리라고 비판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 대행은 시간선택제의 '전일제 전환보장'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확고히 했다. 그는 "시간제가 전일제 일자리로 가기 위한 우회통로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며 "전일제 전환은 어디까지나 기업의 수요와 근로자의 직무역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8개월 넘게 공석인 회장 자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김 대행은 신중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렵게 말을 뗀 그는 "2월 이후 새로운 회장을 모시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었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회장 공석 상태가 지속되면서 재계 일각에서는 한때 경총이 중심을 잡지 못하며 꼬일 대로 꼬인 노사관계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김 대행은 "대형 노사 이슈들이 산적한 부담 때문인지 선뜻 나서는 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중심을 잡고 사안별로 대응해나가는 동시에 노사관계에 대한 혁신적인 비전을 가진 수장을 물색하는 일에도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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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