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자란 두 배우들이 피폐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하려면 감독 자신이 악마처럼 구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인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제작 블루스톰)의 윤종찬 감독과 주연 배우 현빈, 이보영이 제작 후기를 공개했다. 이들 세 사람은 9일 오후 2시 부산시 수영만 요트경기장 내 부산시네마테끄에서 열린 폐막작 기자시사회에 참석해 촬영기간의 고생담과 영화에 담긴 의미를 밝혔다. 윤종찬 감독은 "이청준 작가의 '조만득씨'를 원작으로 했다. 원작을 읽으며 고통이 절정에 다다른 한 사람이 행복하게 미쳤다는 것이 참 좋았다"며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지만 극의 두 주인공은 돈 문제와 아픈 가족의 부양 문제로 큰 고통을 겪는다. 강남에서 별다른 고통 없이 자란 현빈, 이보영 두 배우가 피폐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하려면 감독인 내가 악마처럼 구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채 빚을 얻어 도박을 하러다니는 형과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부양하며 정신적인 고통을 겪다가 하루아침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더벅머리 총각 조만수 역을 맡은 현빈은 "솔직히 촬영하는 동안 너무 힘들었다. 이 작품을 다시 하라면 절대 안 찍을 거다. 그 정도로 힘이 들었다. 정신병 환자가 되 본 적이 없기에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직접 요양원에 가서 과대망상증 환자 만나 인터뷰했다"고 밝혔다. 암에 걸린 아버지를 부양하느라 사채까지 얻어 쓴 피폐한 간호사 수경 역을 맡은 이보영은 "현빈씨도 나도 그동안 참여한 작품 중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마치 하루가 한 달 같이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다"며 "내 감정이 이렇게까지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새 작품을 할 대 한층 성숙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PIFF 폐막작으로 선정된 소감은 ▶ 데뷔하기 전에 내가 연출한 단편을 들고 부산 찾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폐막작에 선정돼 기쁘다. 이제 프린트가 나왔으니 나머지는 보는 사람의 몫인 것 같다.(윤종찬 감독/이하 윤) - '소름'의 아파트에 이어 이번에도 정신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주되게 등장한다. 이유는? ▶ '소름'은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이고 촬영 전부터 공간을 많이 찾아 다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공간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아이템은 제작사인 블루스톰의 대표께서 염두에 뒀던 이청준 작가의 '조만득씨'가 원작이다. 어느날 나에게 한 번 읽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 공간적인 것 보다는 고통이 절정에 다다른 한 사람이 행복하게 미쳤다는 것이 참 좋았다. 남루한 정신병원이 주되게 등장하는 것이 '소름'과 공간 분위기 겹치게 느껴지는 것 같다. 특별히 공간 해석에 중점을 두지는 않았고 오히려 모티브에 관심이 있었다. 이청준 작가를 작년에 만나 요청을 드리니 흔쾌히 허락해서 제작에 들어가게 됐다. 주인공들의 고민은 어찌 보면 상투적 고민들이다. 원작에 없는 부분을 각색하면서 만들어 냈다. 매우 흔한 고민들이고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고민들이다. 돈 문제, 핵가족화 되면서 노인을 봉양하는 문제, 불치병에 관한 문제 등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문제들인데 여러분들이 고통의 질감을 알고 있다면 영화에서 굳이 힘 줘서 다루지 않더라도 충분히 고통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가 넘지 않으려 애썼다. (윤) - 두 배우 다 기존 작품에서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역할을 맡았다.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 전작이 오락 영화여서 변화가 더 눈에 띄는 것 같다. 평소 연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아 변화하고 싶었다. 처음 시나리오 봤을 때 과연 잘 할 수 있을 까 생각도 됐고 처음 맡기에 겁이 날수도 있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감독님과 배우들을 믿고 좋은 영화 나올거라는 생각에 시도했다. 즐거우면서도 힘든 작업이었다.(이보영/이하 이) ▶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연기를 하기는 참 힘들다. 정신병자를 연기하는 것이 책으로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스스로가 정신병자가 아니기에 부담되고 고민도 많았다. 최대한 관련 영화도 많이 찾아보고 촬영 중간 감독님과 이보영씨와 정신병에 관한 영화를 같이 봤다. 촬영하기 전 요양원에 찾아가서 과대 망상증 환나나 피해 망상증 환자도 만났다. 그 분들과 한 방에서 인터뷰하며 느낀 부분들과 내가 체험한 부분들을 연기하면서 시도 했다. 다른 배우들은 어떤 지 몰라도 나는 평소 캐릭터를 갑작스럽게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번 작품 시나리오를 워낙 좋게 봤기에 출연을 결심했다. 이 작품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보는 여러분이 평가해줄 것 같다. 혹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또 하면 된다. 아직 젊지 않나.(현빈/이하 현) -주인공들의 상황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데 제목을 '나는 행복합니다'로 택한 이유는 ▶ 오히려 줄거리는 제목에 반대된다. '조만득씨' 소설을 읽었을 때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미쳤는데 오히려 행복해 하는 내용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슬펐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미쳤을까. 그 사람이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단상이 느껴졌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에 내가 비전을 제시는 못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삶을 포기한다. 옛날 사람들에 비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조그만 것도 이기지 못하고 삶을 포기한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어두움이라는 측면은 마지막에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는 주인공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다. 쉽게 포기한 사람들보다 이렇게 질기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행복이 오지 않을까. 마지막 부분에 두 사람이 멀어질 때 그래도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겠다. 큰 물결을 넘었기에 그게 행복으로 넘어가는 꿈 같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윤) - PIFF 역대 개폐막작 중 흥행한 작품이 별로 없다.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나. ▶ 물론 그런 부담감이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영화가 어려운 점도 있고 쉽게 오셔서 보기 어려운 작품 자체가 지향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만이라도 최선의 위안을 주면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한다. 항상 열심히 만들 뿐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만들면 흥행 될까 생각하고 찍은 적은 없다. 찍다 보면 주제에 몰입할 뿐이다.(윤) - 윤종찬 감독 작품이 배우들을 혹사시키기로 유명한데. ▶ 정말 힘들게 찍었다. 총 6주 동안 촬영했는데 이렇게 힘들게 작업한 적은 처음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선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마치 하루가 한 달 같았다. 시간이 너무 안 갈 정도로 힘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장면을 찍는데 삼일가량 촬영했다. 찍는 내내 '내 감정이 저렇게까지 떨어질 수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 살면서 그렇게 우울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엇다. 촬영을 쉴 때면 방에 커텐을 쳐놓고 방밖으로 안 나갔다. 멍하니 앉아 있엇다. 그러면서 캐릭터에 젖을 수 있었다. (이) ▶ 솔직히 힘들었다. 다시 찍자고 한다면 다시 안 찍을 거다. 너무 힘들게 작품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중한 시간들로 기억되긴 한다. 올 3월 촬영에 들어가 5월에 끝날 때까지 평생 못잊을 순간들이다. 이 영화 찍으며 피부병이 생경 딱 하루 서울에 올라왔다. 나머지는 시골 촬영지에서 캐릭터에 몰입해 지냈다. 쉴 수 있는 시간에도 계속 현장에 머물렀던 건 어느 정도 캐릭터를 찾고 또 거기에 빠져있는 순간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촬영하면서 한 10일 가량을 '나는 행복한가' 계속 질문하게 됐다. 촬영을 쉬는 날 바다낚시 배에 올라 고민을 했는데 지금도 답을 못 찾았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해서 배우 생활을 하고 연기를 하고 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여기 있는 분들이 나를 안 찾아주면 나는 없구나'라고 생각하니 어찌 보면 불행한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평생 숙제가 생겼고 아직 답을 못 찾았다. 이런 영화 찍었기에 그런 생각 진지하게 해볼 수 있었다.(이) - 배우들을 혹독하게 다룬 이유가 뭔가. ▶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현빈이 하겠다고 했을 때 믿을 수 가 없었다. 빈이에게 촬영 중 한 얘기인데 매니지먼트사에서 연기 트레이닝을 시키려고 이 작품에 밀어 넣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나중에 현빈에게 물어보니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고 직접 선택했다더라. 원래 조만수는 30대 중반 캐릭터였는데 시나리오를 현빈에 맞게 고쳤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해보니 집도 강남에 있고 잘 사는 편인 것 같고 이전에는 항상 부잣집 아들 역할만 한 것 같았다. 극에 등장하는 허름한 점퍼 같은 것은 평생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다더라. 고생이란 건 해 본 적이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이보영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극 중 인물들이 고생이라면 이골이 난 친구들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배우의 길에 들어섰냐고 물으니 엄마가 어디로 가라기에 갔더니 미스코리아가 됐고 거리를 가는데 '누가 배우 해 봐라' 해서 연속극에 출연했다더라. 한 마디로 두 배우 다 캐릭터에 전혀 안 맞는 사람들이었다. 요즘 젊은 배우들의 특징은 좋게 말하면 쿨하게 사는 건데 잘 보면 아무 생각이 없다. 이런 저런 경험이 있어야 극 중 인물을 살릴 수 있는데 그런 경험을 시키기에는 제작비도 없고 시간도 짧았다. 결국 감독인 내가 악마같이 볶아 대지 않으면 절대 찍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처음엔 (현)빈이가 자기 촬영이 끝나면 너무 피곤하니까 매니저들과 숙소에 돌아가서 자 버렸다. 나머지 사람들 촬영이 있어도 말이다. 그런데 형이 죽어 납골당에 갔다가 어머니와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는 신에서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감독님, 만수처럼 사는 사람들 많겠죠'라고 하더라. 그 이후에는 점점 캐릭터에 집중해 갔다. 원래 광고 촬영 때문에 10일 정도 촬영을 비우기로 돼 있었는데 본인이 알아서 그 스케줄도 다 취소하고 촬영에 몰입했다. 이보영은 촬영하러 오자마자 병원신을 찍게 됐다. 보영이에게 가장 중요한 신인데 병원 스케줄 때문에 일정을 미룰 수가 없었다. 감정이 극한으로 내딛는 신이었는데 보영이에게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진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울어라'고 요구했다.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치열하고 힘들었다. 배우들을 윽박질렀다기보다는 스토리 자체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웠다. 배우들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정말 고생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화의 퀄리티를 떠나 촬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