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 대한 위험신호가 점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주요 대기업들의 해외자금 조달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파이낸셜 타임즈를 비롯한 외국의 주요 언론들은 한국의 경제위기와 정치ㆍ사회의 혼란상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은 특검 공방으로 극한대결을 벌이고 있고, 대기업은 대선자금 수사로, 금융회사들은 카드채 문제로 각각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 카드발 위기의 진원지인 LG카드사태는 부도 위기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미봉 수준이어서 재발위기는 상존한다. 노조를 비롯한 각종 단체의 극한투쟁은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전국 각 지역에서는 주요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정부와 민간 사이에 첨예한 대결을 벌이고 있다. 모두가 자기 몫 챙기기에 급급할 뿐 타협과 양보의 자세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위기는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원화 값의 하락세만 해도 단정키는 어렵지만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인들의 회의적 시각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미국 달러화 가치가 급락함에 따라 엔화와 유로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올라간 데 비해 원화는 달러보다 더 떨어지고 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원ㆍ엔환율은 최근 3개월새 100원 이상 올라 1,100원에 육박해 있다.
위기를 예감케 하는 보다 직접적인 증거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일 뉴욕시장에서 57bp(0.57 퍼센트 포인트)였던 외평채 가산금리가 2주일 사이에 10bp 이상 뛰어 지금은 70bp에 육박해 있다. 기업에 대한 정치자금 수사에다 설상가상으로 카드사 유동성 문제까지 겹치면서 대외신인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현대자동차가 4억달러 규모의 해외채권 발행을 돌연 연기하고, LG전자 등 주요 기업들의 해외 기업설명회(IR)가 기관투자가들의 질문공세로 차질을 빚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경기가 회생 기미를 보이고 있다고 하나 아직 확실치 않으며, 더 큰 문제는 충격에 대한 완충능력이 상실돼 가고 있다는 데 있다. 중요한 위기대처 수단인 재정여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에 위기가 현실화 될 경우 우리는 지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사태 당시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경제가 처한 위기의 실상을 다시 한번 면밀히 점검하기 바란다. 한국 경제가 지금 놓여있는 상황에 비길 때 불법정치자금이나 대통령 측근의 비리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카드로 승부수 걸어야 할 일은 바로 경제위기를 타개하는 일이다.
<구동본기자 dbko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