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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아버지, 인공지능의 개척자, 나치 독일의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Enigma)를 해독해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은 컴퓨터 과학에서 신화와 같은 존재다. 컴퓨터의 전신으로 꼽히는 계산 장치는 '튜링기계'라는 고유 명사로 불리고 ,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느냐를 따져볼 수 있는 테스트를 '튜링테스트'라 말한다. 비록 그의 존재는 잘 모르더라도 그의 이름은 영원히 되뇌어지고 기억된다. 이는 어떤 학문이 한 사람의 학자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영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수학자의 삶이 영예로 점철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골수 기질이 다분했던 괴짜는 주위로부터 괴롭힘을 당했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아 여성 호르몬을 투여하는 '화학적 거세'를 당해야 했다. 결국 그는 1954년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베어먹는 방식으로 삶을 스스로 끝낸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책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은 시대와 불화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천재 앨런 튜링의 일대기다. 17일 개봉하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원작이기도 하다.
그가 비운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는 비참한 최후는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인생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영국 암호해독캠프인 블레츨리 파크가 수행했던 암호 분석 작업은 전후 30년이 지나서야 이야기되기 시작했으며 동성애자였던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더 긴 시간 침묵하기를 요구받았다. 그런 측면에서 1952년 튜링이 동성애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중 친구 노먼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이 문구는 징후적이다. '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이 사용되지나 않을까 걱정일세. / 튜링은 기계가 생각한다고 믿는다. /튜링은 남자와 동침한다. /고로 기계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을 담아, 앨런'
872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은 치밀하고 꼼꼼하게 '앨런 튜링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 냈다. 책에는 심지어 어린 앨런이 좌우를 잘 구분하지 못해 자신의 왼손 엄지손가락에 조그맣게 빨간 점을 찍고는 '앎의 점'이라고 불렀다는 내용까지 나온다. 더불어 앨런이 고민한 수학·과학적 이론을 담은 과학서이기도 하다. 튜링이 발표한 이론에 대한 고찰은 물론 에니그마 암호해독을 어떤 식으로 이뤄냈는지를 상세히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까지 충족시켜준다.
반면 영화는 앨런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에 좀 더 집중했다. 에니그마 해독을 위해 블레츨리 파크에서 업무를 수행하던 이야기와 그가 동성애자로서 경찰 수사를 받는 이야기, 어린 시절 사모했던 크리스토퍼와의 이야기를 세 개의 중심축으로 잡고 앨런 튜링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영화에 비해 책은 가격도 분량도 다소 접근하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긴 시간 인정받지 못했던 이 위대한 천재의 업적과 삶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공들인 저작을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3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