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적인 재능을 독학으로 깨우치는 등 타고난 예술성을 지녔던 김 감독은 백남준 작가처럼 국제적으로 인정 받아보자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공장을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남 프랑스를 향해 떠난다. 그 곳에서 그는 영화를 처음 접한다. 당시 나이는 32세. 처음 봤다는 영화 두 편'양들의 침묵'과'퐁네프의 연인들'은 이후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김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와 무작정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1995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 '무단횡단'을 출품, 대상을 받는다. 이듬해 첫 영화'악어'를 연출, 감독으로 데뷔한다. 1998년 세 번째 작품'파란 대문'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상영됐으며 다음 작품'섬'이 2000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상을 받았다. 이어 2001년'수취인불명'으로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같은 해'나쁜 남자'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기도 한다. 2003년 연출한'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는 국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쥐며 작가주의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또 2004년에는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는 등 한 해 세계 3대 영화제 중 두 개를 석권하며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해외에서 각광받는 김 감독이지만 국내에서는 그의 작품세계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애지중지 만든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것 조차 쉽지 않았던 김 감독은 예술영화감독의 비애를 공개적으로 토로하기에 이른다. 2006년 당시 스크린을 독식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던 영화'괴물'을 놓고 "'괴물'은 한국영화 수준과 한국관객의 수준이 만난 영화"라는 등의 독설을 퍼붓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08년에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자인 장훈 감독이 연출한'영화는 영화다'로 1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지만 장 감독이 대형 투자배급사와 손잡고 자신을 떠나 큰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어'비몽'촬영 과정에서 주연 배우 이나영이 죽을 위험을 넘기는 일을 겪은 뒤 충격에 휩싸인 김 감독은 모든 활동을 접고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오두막에서'영화란 무엇인가''인간 존재란 무엇인가'등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고민했던 김 감독은 당시 은둔생활을 카메라에 담기에 이른다. 그렇게 탄생된 다큐 형식의 영화'아리랑'은 2011년 칸 영화제에 출품돼'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는다. 잠시 주춤했던 그의 창작열은 그렇게 다시금 솟구치기 시작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김기덕 감독. 모든 게 순탄치 않았던 지난날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예술 영화 외길을 걸었고, 자신의 18번째 작품'피에타'로 마침내 최고상(황금사자상) 트로피를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