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과열 경쟁 '생계형 창업' 벗어나 창의·기술 갖춘 '기회형' 늘려야

[K벤처, 패러다임 바꿔라] 1부. 데스밸리를 넘자 <2> 머나 먼 '창업의 質 고도화'

기업용 모바일 복지 서비스로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창업기업 벤디스의 직원들이 1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본사 사무실에서 사업 방향과 관련해 토론하고 있다. /사진제공=벤디스


신설법인 늘지만 대부분 자영업… 폐업 잇따라

첨단 벤처 안착 땐 고용창출·소득증대 효과 커


고부가 창업 자금 지원 늘리고 안전망 강화를


벤처기업에서 신사업을 담당했던 류승우씨는 정보기술(IT) 버블 붕괴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게 됐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실업자 신세가 된 류씨는 고민 끝에 소자본 창업이 가능한 외식 프랜차이즈를 내기로 하고 퓨전 돌솥비빔밥 전문점을 열었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점 없이 가맹점 확대에 나섰고 메뉴 교육과 핵심소스 제조는 계약을 맺은 메뉴개발자가 맡기로 했다. 독특한 소스 맛이 입소문을 타 가맹점이 15개까지 늘어나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한 가맹점주와 메뉴개발 업체 대표가 소스를 공급하지 않고 직영하겠다고 통보해왔다. 류씨는 직영점 개설에 필요한 자금확보에 나섰지만 이마저 쉽지 않았다. 결국 직원 월급 지급은 고사하고 식당 운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창업 8년 만에 사업을 접고 말았다.

류씨의 사례처럼 국내 창업의 상당수는 도소매업이나 숙박음식점 등 생계형 창업에 몰려 있다. 전 세계적으로 데스밸리를 넘어 성공한 벤처 기업 가운데는 창의성과 고부가가치 기술을 갖춘 '기회형 창업'이 많지만 국내의 경우는 정반대다. 경쟁이 치열한 생계형 창업에 몰리면서 사업을 시작한 기업 10곳 중 4곳은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국가 경제에 혁신을 더하기도 전에 빚만 떠안고 문을 닫는 곳이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 2013년 현재 우리나라의 생계형 창업 비중은 63%로 인도(66%)에 이어 2위를 차지한 반면 기회형 창업 비중은 21%로 34위에 머물렀다. 기회형 창업 비중이 높은 덴마크(75%)나 네덜란드(67%), 핀란드(66%) 등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에서 창업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셈이다. 지난 2년간 신설법인 증가세가 집중된 업종들만 살펴봐도 △기계금속 △전기전자·정밀기기 △자동차·운송장비(이상 제조업) △출판·영상·방송통신·정보 △전문·과학·기술 서비스(이상 서비스업) 등 첨단 벤처 창업기업이 주로 몰리는 5개 업종은 전체 신설법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3년 29.2%에서 지난해 28.5%로 감소한 반면 도소매업과 숙박·음식점업, 부동산·임대업 등 대표적인 자영업종은 30.2%에서 31.8%로 늘었다. 창조경제를 국정과제로 내걸고 창업생태계 활성화에 드라이브를 건 최근 2년간 기회형 창업의 획기적인 증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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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소매업·음식점·숙박업 등 생계형 창업이나 질 낮은 기술형 창업은 진입장벽이 낮은 만큼 과당경쟁으로 생존확률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양질의 창업이 늘지 않아 '창업확대=소득증대+일자리 창출'이라는 공식도 성립되지 않는다. 창업으로 고용이 늘어나도 폐업으로 소멸되는 고용이 더 많다면 사실상 일자리 창출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숙박음식업과 부동산업·운수업은 폐업에 따른 고용감소율이 높은데다 정상 가동되더라도 고용효과가 작다. 특히 숙박음식업은 창업 후 6년까지 살아남았더라도 사업체당 고용규모 증가율이 4%에 불과했다. 같은 조건에서 정보통신업의 사업체당 고용이 8.2명에서 17.1명으로 2배 늘어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기회형 창업 가운데서도 첨단·고기술 창업은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제조업의 기술 수준별 창업 비중을 보면 첨단기술은 13.5%에 불과한 반면 저기술은 47.6%에 달한다. 진입장벽이 낮은 저기술 창업은 생계형 창업과 마찬가지로 과당경쟁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첨단·고기술 대비 실패 위험도 크다. 초기에는 기회형 창업이지만 창업 당시 비즈니스모델을 성장단계별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질 낮은 창업으로 전락하는 사례도 수두룩하다.

수많은 창업기업은 업력이 높아질수록 자금난을 호소한다. 그러나 융자 중심의 창업생태계에서는 뚜렷한 매출실적이나 흑자구조를 내놓지 못한 기업들에 대한 자금조달 창구가 막혀 있다. 정부 지원금 역시 부채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국내 벤처캐피털의 신규투자 규모는 수년째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고 올해도 2조원 규모에 이르지만 여전히 벤처캐피털에 대한 접근성(IMD 세계경쟁력연감)은 39위로 미국(3위), 이스라엘(5위) 등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

3년 전 한국판 에어비앤비(숙박 중개업체)를 내걸고 코자자를 창업한 조산구 대표는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사업체들이 급성장할 수 있던 것은 과감한 투자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며 "국내에서는 매출을 기준으로 삼는 투자관행 때문에 과감한 투자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단순히 창업지원 예산을 확대하는 방식만으로는 양질의 창업을 늘릴 수 없다. 정부 지원이 확대되면서 기존에는 2군에 해당하던 창업기업들까지 수혜를 받게 되거나 창업지원금으로 연명하는 좀비기업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일정 자격을 갖춘 고부가가치 창업기업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재성 중기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제껏 창업정책이 창업기업의 양적 배출에만 집중했다면 앞으로 창업정책은 창업기업의 생존율을 높이고 창업기업이 고용을 늘릴 수 있도록 정착과 성장을 돕는 방향으로 펼쳐져야 한다"며 "고용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도소매업·숙박음식점업같이 생존율이 낮은 업종으로의 진입을 억제하고 생존능력이 크고 생존 이후 고용확대 역량이 큰 분야를 선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리 융자, 단기 컨설팅 등 일회성 지원을 넘어 근본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지원이 우선될 필요가 있다. 창업 선진국에서는 현장경험과 기업·학계·연구계 등을 망라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창업기업에 실질적인 조언은 물론 엔젤투자도 해줄 수 있는 민간 멘토링그룹이 창업플랫폼 하단을 탄탄하게 받치고 있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창업 활력을 높이고 기회형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창업기업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밀착형 멘토링과 창업금융 확대가 필수적"이라며 "경영관리나 R&D코칭 등을 통해 밀착 지원하고 타 기업과의 네트워킹을 도와 사업의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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