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혁의 국제금융시장]금융개혁만이 살길이다
1. 뛰는 세계에 기는 한국
"경쟁력 없는 은행은 도태시켜라"
금융은 전쟁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전세계를 장악할 것 같았던 일본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진 이유는 금융시스템의 낙후에 있다. 미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만든 것도 효율적인 금융시스템이 바탕이 됐다.
그러나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총성없는 전쟁이 24시간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국내금융산업의 경쟁력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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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국경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어렵다. 금융산업의 낙후로 인한 손실은 국민들이 떠안는다. 이에 서울경제신문은 신년기획으로 우리의 금융산업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1부에서는 국내현실과 세계의 금융산업을 조명하고 2부에서는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 아시아 등 주요 국가의 금융대변혁실태를 집중적으로 조망할 계획이다.
일본과 미국. 10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을 추월할 것처럼 보였다. 미국과 유럽의 기업인들이 일본식 경영모델을 배우기 위해 몰려 들었고, 미국의 주요 기업과 부동산도 속속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저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 1.)'같은 일본연구서가 쏟아져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경제는 장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세계최고의 산업경쟁력을 갖고 있음에도 그렇다.
무엇이 미국과 일본의 명암을 갈라놓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금융산업의 경쟁력차이 때문이다. 일본의 은행과 금융회사들이 안주한 반면 미국에서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금융회사들의 경쟁력과 탄탄한 시장시스템이 증시활황을 낳아 신기술이 뿌리를 내리고, 정보통신 혁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속에서 미국은 성장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미국 금융회사들이 갖는 경쟁력은 대형화와 겸업화, 인원감축에서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과 유럽의 금융회사들은 군살빼기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처럼 위기가 닥쳐야 구조조정하는 게 아니라 이익이 나더라도 선제적으로 점포와 인원을 줄이고 있다.
새해를 맞는 미국인들의 화두는 3R이다. 부시의 대선승리로 8년만에 백악관을 되찾는 공화당(Republican)이 첫번째 R이다. 나머지 두개의 R은 금융과 관련된 것이다.
불황(Recession) 가능성이 10년 호경기의 막을 내리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통화정책의 중심을 '긴축'에서 '중립'으로 선회하고 있는 이유도 불황에 선제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다. 마지막 R도 달갑지 않은 것이다.
기업들의 구조조정(Restructuring)이 고개를 들고 있다.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금융회사들이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미국 최대 은행이다. BOA는 최근 실적이 예상보다 더 나빠지자 투자은행 직원 100명을 감축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지난 2년간 직원 1만4,000명 이상을 줄여왔지만 구조조정은 계속되고 있다.
구조조정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 대형화를 위한 합병과 인원감축이다. JP모건과 체이스맨해튼의 합병 작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도 세계 굴지의 금융그룹인 이들이 합쳐지면 말 그대로 세계최대의 금융그룹이 탄생한다.
합병은 인원감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수익이 당초 예상에 못미친 것으로 알려진 직후 이들 은행은 인원감축을 공식 거론하고 나섰다.
애트나생명. 건강보험 분야에서는 미국 최대규모의 보험회사다. 애트나는 최근 직원 5,0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전직원의 13%에 이르는 규모다. 의료보험 분야의 수익성을 올리기 위해 보험료를 인상하는데 따라 고객이탈이 2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자 인원을 미리 정리한 것이다.
당사자들에게는 더 없는 고통이지만 시장은 구조조정을 반기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반응은 주식시장에서 바로 나타난다. 사실상의 사업축소와 인원정리를 발표한 다음날 애트나생명의 주가는 11.5%나 올랐다.
유럽의 금융회사들의 구조조정도 한창이다. 특히 사업이 번성하고 이익이 늘어나는데도 구조조정을 서두르는 금융회사가 많다. 당장은 잘 되지만 전망이 불투명해 '선제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이다. 갠 날 우산을 준비하는 셈이다.
홍콩 등 아시아권이 주활동무대인 영국계 스탠더드 차터드은행은 오는 2004년까지 직원 6,000명을 감축할 예정이다. 이는 전직원의 20%에 해당되는 규모다. 인원감축을 발표할 시점의 전년동기 대비 반기 이익이 25% 나 늘었는데도 사람을 줄였다.
낙후된 금융시스템의 대명사, 덩치만 크고 두뇌는 작은 공룡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은행들도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은 크고 작은 은행들을 정리해 오는 2004년까지 빅 4은행으로 만들 계획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국제금융계의 흐름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한국 금융부문의 국제경쟁력이 주요국가 46개국 중에서 4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은행을 반강제로 합병시켰지만 금융시스템은 여전히 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시티은행 오노 루딩 부회장은 "지금과 같은 금융구조조정 속도와 추세라면 한국은 3년 후에도 건전한 은행시스템을 자신할 수 없다"며 "경쟁력이 취약한 은행은 M&A를 통해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구조조정은 금융개혁의 첫걸음이다. 뼈를 깍겠다는 각오없이는 신금융기법이나 최첨단 전산시스템도 효용이 없다. 외환위기 초기에 보여줬던 리더십도 고통을 감수한다는 의지도 실종됐다.
그러는 사이 주요국의 금융산업은 24시간 쉬지 않고 이익을 창출해내며 변혁을 계속중이다. 갈 길은 멀고 토끼는 뛰고 있는데 거북이는 낮잠을 자고 있는 셈이다.
◇ 기획취재팀 ◇
권홍우 차장(팀장)ㆍ오현환ㆍ서정명기자(증권부), 이진우기자(정경부), 이세정 뉴욕특파원ㆍ장순욱기자(국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