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바둑영웅전 제4보

바둑영웅전 제4보간단히 대패한 백남규 선수로 좌하귀마저 유린한 가리가네2단은 백30, 32로 좌상귀를 큼직하게 지켜 버렸다. 기보는 여기까지만 전해진다. 그 다음의 수순에 대하여 신호열은 말했다. 『흑이 상변과 하변을 모두 차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상변의 백도 살고 하변의 백도 살아 버렸다. 그것으로 흑이 간단히 집부족이더라.』 백남규와 가리가네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대결을 했다. 4연승을 하면 치수고치기로 약속을 했는데 며칠 지나자 백남규가 2점을 놓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것도 순장바둑만의 경우였고 계속해서 벌어진 신식바둑(현재의 바둑)에서는 4점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이 기사는 일본인들이 남긴 것이므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어쨌든 백남규와 가리가네의 대결은 한국의 노국수들이 일본의 프로기사에 비하여 기량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규의 뒤를 이어 국수로 불린 사람은 윤경문(尹慶文)과 채극문(蔡極文)과 노사초(盧史楚)였다. 이 세사람은 한데 어울려 8도를 유람하며 내기바둑을 자주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돈을 탐한 것은 아니고 유람과 대국 자체에 재미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3인 가운데 노사초는 특히 호방하고 기발한 행적으로 유명했다. 1875년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난 노사초의 분명은 석영(碩泳)이고 사초는 호였다. 800석지기 토호의 아들로 25세에 진사시에 급제한 그는 소년 시절에 이미 근동에서는 적수가 없는 바둑 강자였다. 32수 이하 불명 백불계승. 노승일·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7/19 18:12 ◀ 이전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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