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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업사원의 막말 파문으로 '갑의 횡포' 지탄을 받은 남양유업은 중소기업일까, 대기업일까. 지난해 매출 1조3,650억원의 남양유업은 상식적인 기준으로 보면 대기업이다. 외국에서 이론 없이 대기업이라 할 이 회사는 그러나 한국에서만큼은 특이하게 '중견기업'으로 불린다.
사설단체인 중견기업연합회 정의대로라면 사조그룹ㆍSPC그룹ㆍKG그룹ㆍ일진그룹ㆍ귀뚜라미보일러ㆍ영원무역(노스페이스)ㆍ패션그룹형지 등도 대기업이 아닌 중견기업이다. 이들은 단일기업 또는 계열사(관계사)를 합쳐 1조원이 훌쩍 넘거나 육박한다. 만약 남양유업 등이 단지 삼성 등 62개 기업집단(상호출자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 즉 중견기업에 해당한다는 것만으로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집중적으로 받아야 한다면 국민들과 중소업계가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중견련, 대한상의 중견기업위원회 등이 "정부 지원이 없어 크지 못했다"며 성장사다리를 놓아달라 목청을 돋우고 있지만 상위 중견기업들은 이처럼 대기업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명확한 기준 없이 지원 범위의 상단을 1조원으로 넓혀 잡으면서 중견기업 성장사다리 정책이 산으로 가는 모양새다.
◇정책 실패 부르는 중기청=중소기업청이 정책 대상으로서의 중견기업 상한 기준을 매출 1조원 미만 기업이라고 밝힘에 따라 사실상 대기업이거나 매출 규모가 수천억원대로 상당히 큰 업체(기업집단)까지 정책 수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중기청 고위관계자는 19일 "법과 제도에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식적으로 관련 지원사업 등을 고려해볼 때 상호출자제한집단인 대기업에 해당되지 않는 매출 1조원 미만 중견기업이 세제 등 지원 대상"이라고 밝혔다. 중기청의 방침대로라면 매출 1조원에 근접하는, 자립하고도 남을 대기업, 또는 기업집단들이 세제 지원, 조달 참여 등 지원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초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성장사다리 정책의 핵심은 중소기업 졸업시 금융ㆍ세제 등 지원 축소와 규제 강화로 성장을 꺼리는 중소기업들의 '피터팬증후군'을 없애 중규모 기업으로 키우려는 데 있다. 다 커버린 상위 중견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기본법상 졸업이 임박했거나 갓 졸업한 하위 중견기업(또는 상위 중소기업)이 정책 대상이었던 것. 아울러 3년 평균 매출액 1,500억원 기준 자체를 상향하거나 3년의 유예기간을 늘리는 연착륙 조치가 필요하다는 게 양식 있는 중견기업들의 주장이었다.
◇"지원 근거 뭐냐" 의문=산업계 관계자는 "중소기업을 막 벗어난 기업들에 성장사다리용 지원을 하기 위해 이들을 중견기업으로 정하고 혜택을 줄 수는 있지만 수천억원, 조원 단위 매출을 기록하는 기업들의 경우 대기업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며 "상호출자제한을 받는 대기업 계열사 중에는 잘나가는 중견기업에도 못 미치는 매출을 기록하는 회사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크로커다일 레이디' '샤트렌' '올리비아 하슬러' 등 12개 패션 브랜드를 보유한 패션그룹형지는 국내 굴지의 의류전문기업으로 지난해 7,8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형지는 경기도 화성에 국내 최대 규모의 통합물류센터를 보유한 데 이어 올 3월 경남 양산에 최첨단 물류센터를 착공했다. 또 대형 아웃렛을 인수해 유통사업에 진출하고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등 남부럽지 않은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지난해 패션그룹형지의 4분의1 수준인 1,89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건자재기업 한솔홈데코는 모그룹인 한솔그룹이 올해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신규 지정됨에 따라 지원은커녕 한층 더 강화된 수준의 규제를 받게 됐다. 한솔홈데코는 계열사 간 상호출자 및 채무보증이 전면 금지되고 강화된 공시 의무가 적용된다. 또 사안에 따라 과징금 부과와 벌금 등의 제재와 함께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사회공헌 등의 부분에서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중견기업 자의적 정의 고쳐야=중견기업 지원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는 근본 원인은 애당초 중견기업 용어를 사설단체인 중견련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하다는 데 있다. 단순화하면 평균 매출액 1,500억원 이상이면서 상호출자제한집단이 아닌 업체, 또는 기업집단은 규모와 상관없이 무조건 중견기업이다.
중견련의 회원사만 보더라도 조원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과 우량 중소기업의 매출을 하회하는 기업들이 함께 섞여 있어 정체성이 헷갈리게 하고 있다. 관련 법인 중소기업기본법은 중소기업 지원 범위를 제조업 기준으로 종업원 수 300인 미만, 자본금 80억원 이하 등으로 정하고 있을 뿐 중견기업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 분야에 정통한 한 전문가(국책연구기관)는 "일반 소비자들은 대부분 사조산업ㆍ남양유업ㆍ삼립식품ㆍ귀뚜라미 등 규모가 큰 중견기업들을 대기업으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재벌처럼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협력사도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상위 중견기업은 상호출자제한을 받지 않는 대기업일 뿐 따로 중견기업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어 그는 "전세계적으로 중견기업이라는 콘셉트가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