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식의 유혹은 달콤했지만…
김우중 회장이 의욕적으로 키웠던 대우의 해외 공장들. (사진 위) 하지만 그것은 환란을 앞두고 판매부진으로 독(毒)이 돼 돌아왔다. 김 회장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BFC를 통한 분식의 악령(惡靈)을 동원하기 시작했고 끝내 그의 핵심 연금술사들을 형장(刑場)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서울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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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계속)
반칙은 계속됐다. 김우중 회장은 성벽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거듭 반칙을 저질렀다. 어쩌면 반칙이라기 보다는 다가오는 위기를 넘기기 위한 몸부림일수도 있다. 그는 바뀐 세상에서도 자신의 변칙과 편법이 여전히 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판도라의 상자에는 부실의 악귀(惡鬼)만 늘어났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어두운 터널로 빠르게 몰아갔다.
99년 11월 하순 도쿄의 한 호텔. 대회의실에 196개에 이르는 해외 채권자들이 모였다. 그들이 가진 대우 채권만 100억달러.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서 우리 정부와 대우가 준비한 로드쇼에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다. 브리핑 시작 순간, ‘파란 눈’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뜻밖의 질문에 회의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BFC의 내용을 우선 밝혀라. ㈜대우가 97년부터 BFC를 통해 대우자동차등 다른 계열사에 부당 하게 지원한 돈이 33억달러에 이르지 않나.”
김 회장의 확대 경영이 절정을 이룰 때 꿀맛을 만끽했던 그들. 몰락 직전인 98년~99년 사이에도 이자로만 수십억 달러를 거머쥐며 뱃속을 채웠던 그들이 아닌가. 신화가 막을 내리자 그들은 우리 채권자들에게는 너무 생소했던, 김 회장의 ‘민감한 부분’을 가장 먼저 물고 늘어진 것이다. 물론 그들 안에는 오랜 세월 BFC가 둥지를 틀었던 체이스맨해튼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김 회장의 ‘반칙 금융’은 이미 막을 내린 것을.
새 정부 출범을 앞둔 98년 2월. 대우센터 25층 회의실에 장병주 ㈜대우 사장이 김 회장과 마주 앉았다. 직전 년도인 97년 재무제표 작성을 앞둔 시점이었다.
“부채비율을 400% 이하로 줄여. 단기차입금도 96년도 수준으로 줄이고.”
500%가 넘는 것을 한꺼번에 조작하라니…. 하지만 별수 없었다. 황제의 명령, 결국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산과 부채, 당기순이익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 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든 중심에는 BFC가 있었다.
새 정부가 재벌 개혁의 의지를 밝히고 나선 상황이었다. 여기에 금융 기관들은 IMF가 요구한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생존의 잣대로 삼으며 대출을 옥죄고 있는 시점에서 김 회장은 이런 모든 악조건을 정면돌파하는 방법으로 허수(虛數)를 택했다.
마법의 성(城) BFC와 연금술사들의 비극. 그것은 이미 그의 세계 경영이 정점에 이른 9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대우자동차와 그룹의 ‘기함(旗艦ㆍflag ship)회사’인 ㈜대우가 있었다. “쉽게 돈을 구할 수 있다”는 ‘변칙의 등식’, ㈜대우는 자동차를 살리기 위해 넘어서는 안될 한계를 자꾸 들락거렸다. 전직 ㈜대우의 자금을 담당한 A씨는 회사 자체는 원래 튼실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룹이 돈을 빌릴 때 다른 곳보다 ㈜대우가 나서는 것이 빨랐습니다. 대외적으로 그룹의 대표회사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런 뒤 계열사들에 배분하는 거죠. 헌데 환란 1~2년 정도를 앞두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자동차 해외 법인에 구멍이 생기고 차입도 제대로 안되고…. 별 수 있나요. 운영자금을 만들기 위해 턱도 없는 금을 수입해서 재수출하면서 수출금융을 받아 수입은 외상으로, 수출은 수출금융으로…, 손실은 봐도 돈을 빌릴 수는 있잖아요. 거 참…”
그랬다. ㈜대우의 끝 모를 부실로의 함몰, 그 것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팽창 전략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킴기스칸’으로 칭송 받게 했던 동구권 공장들이 출발지였다.
90년대 중반의 인수 열풍이 식을 무렵. 해외 법인들에 비상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폴란드 공장 외에는 모두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매년 판매량은 20∼30%씩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 인도공장만이 그럭저럭 버텨나갔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부품 공급이 늦어지다 보니 출고는 자꾸 지연됐다. 품질 결함마저 발생했다. 곳곳에서 예약 취소 사태가 이어졌다.
생산에 문제가 생기니 해외 판매 법인 곳곳에서 구멍이 생겼다. 떼워 주는 일은 BFC의 몫이었다. 워크아웃 이후 BFC를 실사했던 고위 인사의 말에는 그 속을 조금은 짐작하겠다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BFC 조사에서 해외 빚 이자를 갚는데 쓴 34억달러를 빼고 40억달러의 회계 처리가 맞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검찰은 200억달러 운운했구요.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령 미국 현지 법인에 1억달러 손실이 생겼다고 해봐요. ㈜대우 휘하의 BFC가 그 돈을 메워 주려면 장부를 조작해야 합니다. 단순히 1억달러만 가공매출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10억달러를 만들어 1억달러 이익이 난 것처럼 해야죠. 오랜 세월 그런 방식을 쓰다 보니 장부 조작 규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요. 물론 그룹전체로 봐선 분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 쪽 것을 다른 쪽에 옮긴 것이니까….”
김 회장을 옭아 매기 시작한 분식의 악령(惡靈), 그것은 자금난이 수면위로 올撰?98년 절정에 다다른다. 해답은 환란 후 김 회장이 설파한 ‘수출 500억 달러론’으로 연결된다. 이번에도 선장 역할은 ㈜대우가 맡았다.
김 회장의 수출 지상주의, 전위부대로 나선 ㈜대우는 수출을 무조건 늘리기 위해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수출에 나섰다. 자연스레 외상 수출대금 등 국내외 매출채권은 급속하게 늘어났다. 현대종합상사는 물론 삼성물산까지 제치고 1위 등극. 98년 말에는 외상 수출대금과 매출채권 규모가 12조4,000억원까지 늘어났다. 97년말 3조2,000억원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늘어난 채권의 3분의1인 8조원은 ㈜대우와 계열사간에 가공으로 만든 채권이었다. 그래도 돈은 만들어지니까. ㈜대우는 이렇게 빠르게 부실의
블랙홀로 변해 갔다. ㈜대우의 실사를 담당했던 삼일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부실의 속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곳곳에 증빙 서류도 없는 자금 거래들이 널려 있더군요. 수출관련 대금을 사용한 흔적이 불분명한 것도 많았어요. 계열사간에 온갖 거래가 이뤄졌지만 채권 채무액이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이 허다했습니다. 그런 것이 적게는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이르더군요.”
㈜대우가 이렇게 가짜 서류를 만들어 은행에서 빌린 돈만 25억달러에 달했다. 물론 그 돈은 BFC로 들어가 구멍 난 현지 법인들에게 투하됐다.
부실은 계열사들이 갖고 있던 지분과 해외 투자 부분에도 고스란이 이어졌다. 어지간한 계열사는 ㈜대우가 자금을 출자해 인수한 회사들. 그러나 지분은 그룹의 위기가 시장에 전해지면서 시가 하락으로 손실로 이어졌고, 해외투자도 무더기 실패로 이어졌다. 건설부문도 마찬가지였다. 망해가는 회사의 돈을 떼먹자는 심사였나, 리비아ㆍ파키스탄 등 해외 대형 공사 시공 이후 받지 못한 돈이 수두룩하게 늘어났다.
분식의 유혹은 몰락하는 순간 극성을 부렸다. ㈜대우의 전직 임원 A씨가 전한 말은 마지막 순간의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회계를 무시한 자금거래는 오래 전 시작됐죠. 헌데 98년말 한계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대우 명의로 돼 있던 현지 법인의 자산을 대우차에 몰아줬습니다. 대우중공업까지 경차 제조 부분을 자동차에 양도했구요. 넘겨주기만 하면 뭐합니까. 대우차는 결국 나중에 워크아웃에 들어갈 때까지도 중공업에 그 빚을 갚지 않았어요. 결국 최종 순간에는 ㈜대우와 대우차가 사실상 한 몸이 돼버렸어요.”
생존에 대한 끝 없는 집착과 반칙 경영, 그것은 결국 한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98년 10월, 자금난이 목줄을 타고 올라오던 무렵, 국제금융팀의 핵심 인맥으로 BFC를 책임졌던 L씨가 교통사고로 절명한 것이다. 몰락의 끝은 이처럼 비참했다. 김 회장 수사를 맡았던 대검 중수부 관계자의 말에는 기업을 제법 이해하는 대목이 들어 있다.
“기업가에게 분식으로 현금을 확보하려는 것은 일종의 ‘악마의 유혹’입니다. ”
부패한 세계 경영의 젖줄, 그것은 결국 스스로가 만든 올가미였고 자신이 그렇게 아꼈던 분신들 조차 형장(刑場)의 틀로 이끌고 갔다. 김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대우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을 지낸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은 이렇게 안타까움을 전했다.
“사법 처리된 임원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김 회장이 잘 나갈 때 있었던 과거 임원들은 부를 축적하고 지금은 시효가 지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하지만 사법 처리된 임원 대다수는 실무자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부도 명예를 누리지 못했어요. 다 옛날에 과장, 부장하던 사람들이죠. 환란이 터져 어려워지니까 부사장, 사장으로 발탁된 겁니다. 결국 분식에 책임을 져 사기죄가 되고 배임이 되고…. 난 이들이 의사결정에 본질적으로 미친 영향은 적었다고 생각해요. 김 회장 지시를 받아 대표이사로 도장 찍었다는 것만으로 중형을 선고를 받는 것은…. 선고가 가혹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어서 말하기 그렇지만 도덕적인 책임은 미미하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