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7일] 앨런 튜링

[오늘의 경제소사/6월7일] 앨런 튜링 권홍우 찰스 배비지, 폰 노이만으로 이어지는 컴퓨터 선구자 명단에 빠진 이름이 하나 있다. 비운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Alan M Turing)이다. 누락 이유는 두 가지. 세계대전과 냉전 속에서 재능과 업적이 비밀로 묶인데다 동성연애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튜링은 2% 부족한 학생이었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특출한 재능이 있었지만 필체가 엉망인데다 단순계산은 자주 틀렸다. 말도 더듬었다. 두각을 나타난 것은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시절. 인도에 근무하던 부모의 귀국으로 출생(1912년 런던) 후 처음으로 온전한 가정의 울타리에서 지내면서부터다. 원시적 컴퓨터 ‘튜링 머신’을 만든 것도 이 무렵이다. 학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아인슈타인 등 당대의 석학들이 모여 있던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초청을 받아 박사과정을 마쳤다. 원자탄과 현대 컴퓨터의 개척자 노이만이 공동연구를 종용했으나 모교로 돌아온 게 1938년. 곧 이어 터진 2차 대전에서 그는 수학으로 조국을 구했다. 독일의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한 것. 불침함이라던 비스마르크호의 격침도 그의 암호해독으로 가능했다. 최초의 컴퓨터 ‘콜로서스’도 만들었다. 영국이 비밀로 부치는 통에 ‘에니악’에 공식적인 ‘최초의 컴퓨터’자리를 내줬지만. 전후 인공지능 연구에 열중하던 그는 1952년 나락으로 떨어졌다. 동성애가 발각됐기 때문이다. 형벌은 중성화. 지속적인 여성 호르몬 투입은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46분3초에 완주했던 강건한 신체를 변화시켰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둔부가 퍼지자 화학적 거세를 자각한 그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 심정으로 사과를 집어들었다. 1954년 6월7일 청산가리를 주입한 독사과를 베어먹고는 영면(永眠). 42세 나이였다. 입력시간 : 2006/06/0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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