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목격자·증거도 없는 청소년 성범죄 사건… 1시간30분 열띤 토론 끝에 거수로 "유죄"

■ 그림자배심원제 참여해보니<br>공판 끝나자 첫번째 평결<br>"피해자 수치심" "증거 부족"<br>의견 교환후 다시 결론 도출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한 배심원들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판에 앞서 선서를 하고 있다. /서울경제DB


2013년 1월 15일 오후 5시 20분경. 서울 관악구청 앞 횡단보도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뭐 하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 경찰서에서 일해요"


교복 위에 검정 패딩점퍼를 입은 여고생(17)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뒤편에 서있던 노인(79)은 크게 당황했다. 약 20분 뒤 딸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와 경찰차가 거의 동시에 현장에 도착했고, 노인은 곧장 지구대로 호송됐다.

여고생은"양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좌측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가슴 왼쪽을 만졌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노인은 여고생에 팔을 톡톡 건드리긴 했지만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호송되면서 조사는 길어졌고 노인은 밤 10시를 훌쩍 넘어서야 귀가했다. 그리고 얼마 후 노인은 아동ㆍ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으니 법정에 출석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이상이 지난 21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이 다룬 사건의 개요다. 이날 재판에 기자는 그림자배심원으로 참석했다. 그림자배심원제는 실제 배심원과 똑같이 재판을 방청한 후 평의ㆍ평결 절차를 거쳐 결론을 도출해 보는 모의 배심원 제도다. 이날 그림자배심원으로 참여한 사람은 모두 14명. 7명으로 구성된 실제 배심원보다 딱 2배 많았다.

사건은 얼핏 간단해 보였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직접 목격자도 증거도 없어 배심원들은 오로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만을 듣고 유무죄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양 측의 진술은 극명하게 달랐다.

여고생 측은 노인이 가슴을 기습적으로 만져 성적수치심을 안겼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인인 강모씨는 "핸드폰 사용법을 물어보려고 학생의 왼쪽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환한 대낮에 집 앞 대로변에서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냐"며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검사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각할 이유가 없다"며 피해자 진술에 신뢰를 더했고, 변호인은 "피해자 진술이 거짓이라 생각지 않는다. 다만 상황이 오해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진실 공방은 증인 신문에서도 계속됐다.


피해자인 딸을 대리해 법정에 출석한 모친 신모씨는 "가해자가 사건 당시 현장에서 '어리고 예뻐서 그랬다'고 사실을 인정하는 말을 반복했다"고 진술했다. 또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인근 식당 주인 A씨가 "저 할아버지 예전에도 애들 상대로 그랬다"는 말을 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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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변호인 측에서 A씨가"경찰진술서의 내용은 순간 착각해 잘못 말한 것"이라고 진술한 사실확인서를 반대증거로 제출했다. 아울러 A씨 부부가 피해 학생 친구의 부모로 신씨와 평소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A씨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누구의 말이 더 믿을만한가를 따져보려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신씨는 "딸은 공부도 잘하고 원만하고 침착한 성격"이라며 거짓말이나 착각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피고인의 아들 강씨도 "아버지는 매일 탁구를 치는 등 건강하게 생활한다. 6ㆍ25 참전용사로 명예를 중시하는 국가유공자"라고 강조했다.

오후 6시, 여전히 많은 부분들이 모호했지만 모든 공판 절차는 끝났다. 검사는"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강하게 바라고 피고인 역시 개전의 정이 없다"며 징역 8월을 구형했고, 곧 배심원들의 평의 절차가 시작됐다.

같은 시간 그림자 배심원들도 평의에 들어갔다. 의견 교환 없이 시작한 첫 번째 거수에서 유죄가 8명, 무죄가 6명으로 집계됐다.

유죄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피고인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의심이 갔고,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피해자가 성적수치심을 느꼈다면 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피고인이 사건 당시 "예뻐서 그랬다"고 말한 사실이 유죄를 확신하게 했다고 언급했다.

무죄를 주장하는 측은 피고인의 유죄를 확신할 만한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사실이 마음에 걸리고 피해자 모친의 말 역시 과장된 부분이 많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의견을 나눈 뒤 2차례의 거수를 추가로 진행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좀 더 의견을 모아보려는 순간 배심원들의 평의가 끝났다. 유무죄를 판단하고 양형까지 결정하는데 약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후 7시 35분. 법정에 들어온 재판장이 배심원 7명 중 4명이 유죄, 3명이 무죄 의견을 냈음을 알렸다. 재판을 지휘한 유상재 부장판사는 배심원들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 강씨에 유죄를 선고했다. 강씨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는 벌금 250만원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였다. 아동ㆍ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유죄를 받았기에 관할기관에 신상정보도 등록해야 했다.

재판이 끝난 후 가장 궁금한 것은 피고인이 과연 판결 결과에 승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배심재판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꼽히는 미국에서는 배심원 전원의 만장일치가 아니면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 국민참여재판 역시 만장일치를 추구하지만 안 될 경우 다수결로 평결한다. 피해자에 죄가 있다고 판단한 배심원은 무죄 측보다 고작 1명이 많았을 뿐이다. 무리하게 다수결로 결정짓기보다 좀 더 시간을 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수 있는 기간은 선고일로부터 7일이다. 강씨의 경우 28일까지 항소가 가능하지만 27일 현재 항소장을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어찌됐건 이 고통(재판)이 오늘로 끝나면 좋겠다"던 강씨의 최후진술에서 이유를 짐작해볼 따름이다.

김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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