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시절 내가 출입하던 한 경제부서의 장관과 공보관은 동창생이었다. 조직에는 위계질서가 있으므로 공보관 L씨는 장관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존칭어를 쓰는 것은 물론 항상 장관 앞에서는 두 손을 잡고 약간 허리를 굽힌 자세였다. 나의 궁금증은 두 사람이 장관실에 있을 때도 그런 상하의 금도가 지켜질까 하는 것이었다.
L씨는 안 그렇다고 했다. 격식을 차리는 보고를 할 때는 약간 어물어물 넘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존칭 없이 평어로 말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장관이 기자들이 시끄러운 문제를 놓고 회견을 요청하는 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걱정하지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럼 장관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공적 조직에서 이런 태도가 좋은 것인지는 물론 문제가 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해 할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
사람은 조직에서 직위가 올라가면 고독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직분의 상승은 상하의 구분을 선 그어 어제까지의 수평적 관계를 무너뜨린다. 자연 격식을 갖추게 되고 호칭과 존칭어로 상급자와 하급자의 분계가 명확해 진다.
예우를 받는 쪽은 기분이 좋지만 어제의 동류사회로부터 경원해 질 수밖에 없다. 장관 정도가 되면 한 조직이 아래에 있으니 피라미드의 정점이다.
그러니 가끔은 인간적 파격이 그리울 때도 있을 것이고 중요한 단안을 내릴 때는 고독감이 절정에 달할 듯 싶다.
그 장관이 동창생 공보관이 말을 놓는 것을 불경죄로 다스리지 않는 것은 고독감을 완화시키는 보상 때문이었을 것이란 짐작이다. 언론사 사장을 할 때 나도 이런 체험이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 아침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국립묘지 참배를 할 때 TV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킨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의 인생 역정과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파란만장했던 것처럼 노 당선자의 얼굴은 간단치가 않았다. 온갖 감회가 뒤엉킨 얼굴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영광의 절정에서 스치는 고독감을 읽었다. 권력 사회에서 그는 하루아침에 혼자 우뚝 솟아 오른 것이다.
이미 그의 주변은 경호대에 의해 차단되기 시작했고 어제의 내노라하는 당 동지들은 그의 앞에서 극 존칭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가장 높이 올라갔으므로 가장 고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영광은 엄청난 정서적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 무게를 항시 느끼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싶다.
손광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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