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며칠 전 퇴근길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듯한 20대 청년의 전화통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었다. 취업을 앞둔 눈치인 그 청년은 또 한번 취업의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던 모양이다. 집을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던지 아파트 그림자에 숨어 길 옆의 돌멩이를 툭툭 차면서 취업에 실패한 친구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고 있었다. "다 잘 될거야. 너도 끝까지 힘내라."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지나치면 한번쯤은 우연히 엿듣게 될 통화 내용이었겠지만 그 청년과 좀 더 멀어지기 전에 내 귀에 들렸던 말이다. 곁눈으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에게 또 친구에게 격려하던 그 청년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지나쳤다. 어느새 2010년도 저물고 있다. 파국의 길 선택한 잠원동 사건 올해 기자를 개인적으로 가장 고민하게 만든 뉴스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도 아니고 신한사태도 아니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나라 안팎을 뒤흔들 정도로 깜짝 놀랄 사건이었지만 기자 개인의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들지는 않았다. 일상에 파묻혀 약간은 심드렁하게 지내던 기자를 주춤하게 만든 것은 연말에 발생한 '잠원동 묻지마 살인사건'이었다. 미국 명문대 유학생이던 20대 초반의 청년이 PC방을 뛰쳐나가 처음 눈에 띈 사람을 향해 휘두른 칼질에 또 다른 20대의 젊은이가 애꿋게 죽음을 당한 황당한 사건. 미리 선을 긋자면 그를 변호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동정을 받을 여지도 그리 많지 않다. 잠원동 사건은 성년의 길을 밟아온 한 청년이 갑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며 막장의 선택을 취한 극단적인 살인일 뿐이다. 이를 놓고 폭력성을 키우는 컴퓨터 게임 때문이라고 내렸던 초기 원인진단은 그 청년이 살아왔던 방식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를 알고 있는 동창이나 친구들은 줄세우기에 몰입해온 우리 사회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언제 어느 사회건 줄세우기가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 청년은 지금 우리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상대적으로 '앞선 자의 길'을 걸어왔었다. 아무리 피해의식은 상대적이라지만 그의 좌표는 앞줄에 있는 사람들보다 뒷줄에 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 그가 왜 하필 파국의 길을 선택했을까. 대상을 정하지 않고 파괴본능만을 분출시키는 묻지마 범죄가 분명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극도의 좌절과 정신적 혼돈은 사소한 자극이나 착각만으로도 자칫 파멸로 이어진다지만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국으로 내몰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리라. 좌절·혼돈 속 용기 잃지 말길 잠원동 살인 사건에는 분명 2010년 한국사회의 모순된 지향점들이 서로를 자극하며 증폭시키는 이중ㆍ삼중의 불협화음이 담겨 있다. 그렇다 해도 개인적인 좌절과 혼돈이 반드시 파국의 선택을 하도록 내몰지만은 않는다. 신화 속 이야기지만 온갖 재앙과 죄악이 가득 담겨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좌절과 혼돈ㆍ파멸의 길만 펼쳐질 것을 몹시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판도라 상자는 지옥으로 통하는 문턱을 세상에 열어젖히면서도 마지막으로 지옥을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열쇠를 우리에게 넘겨줬다. 개인의 인생 앞에 좌절과 절망ㆍ혼돈만이 가득하더라도 지옥만 보지 말고 희망을 꼭 믿으라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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