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장과 행장 둘 다 경징계가 나오지 않는 이상 애초부터 대혼란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은행이 대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판에 직원들이라고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겠습니까."(국민은행 A 임원)
100여명이 넘는 금융권 임직원에 대한 징계가 속도를 내면서 상당수 금융회사에서 금융감독원 징계에 따른 심각한 후유증과 경영 공백이 가시화하고 있다.
일부 금융사에서는 징계를 고리로 물갈이 인사가 예상되자 고질적인 줄서기 문화까지 재연되는 모습이다.
징계 수위를 확정 짓는 작업이 다음달까지 이어지면서 당장의 경영 공백은 물론 물갈이 인사로 조직 분위기 전반이 흉흉해지는 상황에서 최근 동부그룹 등 대규모 기업 부실 현실화로 수익까지 적신호가 켜지면서 금융사 경영 전반에 비상등이 켜졌다.
◇리더십 상실에 조직 분위기 흉흉…줄서기 문화까지=KB의 경우 당장 회장과 행장에 대한 징계가 확실시되면서 리더십 전반에 상처가 불가피하게 됐다. 회장이나 행장이 극적으로 자리를 유지하더라도 인사 및 경영권의 중심을 잡을 결제 라인이 함께 흔들리면서 은행 전체적으로 대혼란이 생길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국민은행의 경우 19명의 임원진 가운데 이번에 징계 방침을 통보 받은 일부 임원을 포함해 정기 인사 수요까지 감안하면 3분의1가량이 조만간 교체 대상이다. 하지만 최고 경영진이 모두 징계를 받은 상황이다 보니 임원 인사부터 시작해 하반기 영업계획 등 은행의 주요 의사결정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LIG손보 인수를 앞둔 KB금융지주 역시 회장을 비롯해 부사장과 최고정보책임자(CIO) 등이 징계를 받아 경영 혼선과 대규모 인사 조치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감원의 징계 방침 통보에도 불구하고 국민은행의 사외이사들과 이건호 행장 측이 전산시스템 교체 문제를 두고 여전히 대립하는 등 내분 사태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은 금감원의 징계 사전통보가 내려진 후에도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 IBM을 공정위에 제소하고 이 행장과 정병기 감사를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등 강경한 모습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당국의 고강도 압박으로 KB금융이나 국민은행 최고경영자(CEO)가 물러나고 감사나 사외이사가 교체된다 해도 당분간은 대혼란이 불가피하다. 정치권이 가뜩이나 총리 및 주요 장관 인사 문제 등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관피아 논란까지 겹쳐 있어 금융권 CEO 인사가 속전속결로 처리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KB금융지주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향후 3~4개월 동안은 은행이 제대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징계 수위가 약한 우리은행과 씨티은행 등에서도 일정 부분 경영 혼선이 예상된다. 우리은행은 이순우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과 기관에 대한 징계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영업활동 등에서 일정 부분 제약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씨티은행은 최근 지점 폐쇄와 희망퇴직 문제 등을 놓고 노조와 하영구 행장 측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가운데 하 행장에 대한 징계 방침이 확정되면서 노조의 공격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금융사에서는 후임 CEO로 거론되는 사람들에 대한 줄서기 조짐이 다시 엿보인다. 새 경영진 체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인적 물갈이를 통해 재기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이미 조직에서 물러난 전직 임원들의 복귀 움직임도 가시화하고 있다.
대규모 징계가 조직 전반의 질서까지 해치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 공동의 쇄신 작업 필요 목소리=정보 유출 파문으로 전직 CEO들이 해임권고를 받은 국민카드·롯데카드·농협은행 등 카드 3사에서도 현직 임직원에 대한 징계 방침이 확정되면서 조만간 인사 폭풍이 불어 닥칠 것으로 전망된다. 정보 유출 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이미 예상됐던 징계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면서도 "정보 유출 사고로 경황이 없어 미뤄진 정기 인사가 징계 이후 징계 수위를 반영해 대규모로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사상 초유의 대규모 징계에 따른 금융권의 경영 혼선이 커질 것으로 보이면서 당국이 이번 사태의 여파가 소비자 피해 등으로까지 미치지 않도록 각 금융사의 지배구조를 빠르게 안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자칫 경영 혼선이 금융사의 내부통제 부실로 이어지고 이것이 금융사고 등으로까지 번질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직 금융당국의 한 임원은 "감독당국이 단순히 여론에 편승해 대규모 징계를 내리는 수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금융사가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 전직 은행장은 "징계가 능사가 아니라 이제는 금융회사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당국과 금융회사가 공동으로 찾을 때"라며 "'보여주기 식'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벤트라도 필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