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 선대회장부터 이건희 회장 체제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전통적으로 '경리(재무) 전문가'를 중용했다. 옛 구조조정본부는 물론 현 미래전략실까지 재무 전문가들이 핵심에 위치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로 내려갔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과 구학서 전 신세계 회장 등이 각각 제일제당 관리부, 제일모직 경리부 출신으로 삼성에서 승승장구한 경영인으로 꼽힌다.
그만큼 재무적 투명성을 삼성은 소중하게 생각한다.
삼성전자 두바이법인에서 일어난 회계 부실은 삼성의 이런 자부심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삼성 내부에서는 실제로 이번 회계 오류에 대해 '자성론'이 일고 있다.
그동안 제품 생산공정이나 마케팅 등에 문제가 있어 경영진단이 이뤄진 일은 있어도 회계 문제로 전(全) 해외판매법인에 대해 집중 회계 점검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일개 판매법인에 불과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자칫 글로벌 무대에서 삼성의 재무적 투명성이 의심 받을 수 있는 탓이다.
재계에서는 이번 회계 부실 사건이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전반의 혁신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진 후 △삼성테크윈 매각 등 사업 구조조정 △삼성물산 합병 등 지배구조 개편 등 굵직굵직한 부분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뤘지만 그만큼 경영 역량이 분산돼 내부를 돌보는 데 소홀했다는 것이다.
즉 삼성물산 사태 등 일련의 하드웨어적 수술이 끝난 만큼 내부 문화 등에 대한 체질개선과 동시에 숨겨진 오류는 없는지 정밀 진단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삼성 출신의 한 퇴직 임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년 동안 외부 위험요인 제거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앞으로는 '내치(內治)'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서라도 대대적인 쇄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통해 삼성의 마하 경영을 이끌어왔다.
현 시점에서 이 부회장이 주도해야 할 삼성의 혁신은 크게 나눠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스마트폰(IM)·반도체(DS)·생활가전(CE)으로 나뉜 현 사업구도에서 수익성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의 경우 선제적 투자를 거듭하며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어느 정도 격차를 벌렸지만 IM과 CE 부문의 실적은 점차 내림세를 타는 추세다.
특히 스마트폰의 경우 올 들어 마케팅 전략을 바꿔가며 대대적인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실적이 신통치 않아 원점에서 제품 전반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올해 2·4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당초 재계에서 예상한 8조원에 크게 못 미치는 6조9,000억원 수준에 그쳤다.
삼성전자의 신수종 사업으로 꼽히는 바이오산업에서도 기존의 틀을 깨는 혁신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해 대표 바이오 계열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사업 확장에는 일단 탄력이 붙었다. 하지만 단순히 제너릭(복제약)을 개발해 파는 수준으로는 세계 시장을 선도할 먹을거리가 되기 어렵다는 게 삼성 안팎의 시각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바이오 사업을 강조하는 것은 웨어러블 전자기기처럼 삼성의 전자와 바이오 기술을 융합하라는 지시"라며 "지배구조가 어느 정도 안정화된 만큼 이런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가 집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