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김승웅 휴먼칼럼] 변론의 정치학

변론치고는 너무 감동적이다. 재판 구경은 으레 논고보다 변론쪽이 압권임을 인정하더라도 그렇다. 이번 재판이 탄핵이라는 국사급 송사라서, 아니면 피고인 클린턴 스스로가 변호사라서 그런 명변론을 냈는지도 모른다.문제의 변호인은 워싱턴 정가에서 첫 손 꼽히는 명연설가 데일 범퍼즈(73). 지난 선거때 4선의 상원의원(아칸소주)임에도 불출마를 선언, 후배 정치인에게 자리를 물리고 은퇴를 선언한 큰 정치인이다. 「돌아온 범퍼즈」의 연설에 배심원 자격으로 참석한 100명의 옛 동료 상원의원들이 숙연해졌다. 상원 변론석에서 오랜만에 불을 뿜는 옛 동료의 마이크 솜씨에 의원들이 넋을 잃은 것이다. 그의 변론은 결코 쭈볏대는 법이 없다. 개구일성, 본론으로 곧장 파고든다. 『클린턴을 새삼 탁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심판을 받은 인물입니다. 아내 힐러리와는 갈데까지 다 갔고 외동딸 첼시아와도 언제 끝날지 모를 관계에 처해 있습니다.』 이 상황임에도 미국은 그를 탄핵으로 잡아야 하는가. 배심원들은 초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변론을 일단 가족쪽으로 몰아 단초를 여는 것이 전황에 유리함을 아는 변호인 특유의 「전술」에 배심원들이 걸려든 것이다. 같은 가족 얘기지만 특히 자식 얘기에 청중들은 자즈러지게 마련이다. 대학 2년생 첼시아의 고민이 한 웅변가에 의해 상원 전체의 고민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변론은 계속된다. 『지금 클린턴에게는 매일 밤이 불면의 밤입니다. 이런 밤이 5년간 계속돼 왔습니다. 이 와중에서 대통령은 친구와 참모들을 속이고 막바지엔 국민들마저 속였습니다. 왜냐.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 또 창피와 슬픔을 달래 줄 수 있다면 자신의 사지를 찢어 발기더라도 아까울 것 없던 딸 첼시아를 위해서였습니다.』 변론은 변호인과 클린턴간의 관계를 알고 나면 더욱 감동적이 된다. 둘다 동향(아칸소)에 같은 민주당 소속이지만 둘은 한마디로 정적이었다. 아칸소 주지사인 범퍼즈는 곤궁에 빠진 옛 라이벌을 구해내기 위해 또 한차례 큰 정치인이 돼야 했다. 클린턴의 구명을 위해 무임 변론을 자원, 옛 상원 동지들한테 탄핵 종결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변론은 서서히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클린턴이 보인 처사는 누가 뭐래도 항변할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한마디로 뻔뻔했고 격분을 자아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처사였습니다. 다만 한가지,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의 잘못이 탄핵으로 쫓아 낼 정도로 중죄였던가라는 자문입니다.』 배심원석 이곳 저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상원들이 늘기 시작한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사전에 조심했어야 옳다고 말하시겠지만 (상원석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당신, 당신, 당신… 한사람 한사람한테 직접 묻겠습니다. 아니 수백 수천만의 미국 시민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사전에 그리 완벽하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상원들의 몸짓은 이제 웅성대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역시 범퍼즈야』 『저친구, 여전하군』 놀라운 것은 웅성대는 쪽이 클린턴의 민주당이 아니라 공화당쪽이라는 점이다. 공화당 상원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주초에는 아예 공화당 중진의원들의 입에서 조차 물건너간 탄핵으로 치부하자는 주장이 공공연히 돌기 시작했다. 바로 이점이다. 선량들이 선거구민 또는 소속당의 압력을 깨고 반대당의 입장에 흔쾌히 설 수 있는, 미국 정치 특유의 아름다운 장면을 재연한 것이다. 탄핵을 강행해야 하는 당의 입장임에도 이들 큰 정치인들은 당압(黨壓)에서 벗어나 옛 동료의 호소에 선뜻 몸을 실은 것이다. 범퍼즈 변론으로 지난 한주 미 국회의사당 뿐 아니라 미 정가가 후끈 달아 있다. 좀 부풀리자면 그의 변론으로 공화당은 이제 더이상 대통령 탄핵을 강행할 여력을 잃어 버렸다. 이번 주 들어서는 아예 공화당석에서 조차 빨리 폐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다. 미 대통령 탄핵이 옳고 그른지의 판단은 정확히 내 영역 밖의 일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범퍼즈의 변론을 통해 무엇이 미 의회민주주의의 요체임을 실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8개월만의 이번 워싱턴 나들이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서울 같았던들 한갓 단신으로 처리됐을 외신 한토막이 현장에 와보니 이처럼 커진다. 현장은 뉴스의 배경과 의미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뉴스가 우리에게 과연 어떤 것으로 와 닿는지를 정확히 가르쳐준다.<워싱턴에서>【언론인, 우석대교수】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