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28일] 헨리 8세 & 돈


영국왕 헨리 8세는 씀씀이가 컸다. 1520년 프랑스 국왕과의 회담에서는 수행원 5,700명, 말 3,000마리가 도버해협을 건넜다. 수많은 스캔들과 얘깃거리를 남긴 6번의 결혼과 각각 두 번씩의 이혼과 처형, 사별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는 데도 돈이 들어갔다. 재위 38년 중 14년을 보낸 전쟁에도 돈이 필요했다. 끝없는 재정수요를 그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우선 운이 좋았다. 1491년 6월28일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인 에드워드 6세가 빨리 죽는 바람에 왕위에 올라 부왕 헨리 7세가 남긴 탄탄한 재정을 물려받았다. 스페인 공주 출신으로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온 형수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도 주머니를 불려줬다. 재산은 금세 동났다. 사치와 과도한 국방투자 탓이다. 울시 추기경을 내세운 세금증액이 한계에 이르자 연 16%로 돈을 빌렸다. 당시 법정이자율 10%보다 높은 고금리에도 조달이 어렵자 납을 모아 수출하는 방안까지 짜냈다. 영국을 가톨릭으로부터 이탈시킨 수장령을 발표한 진짜 이유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에 반대하는 교황에 대한 항거보다는 교회 재산을 노렸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영국 해군의 건설자로 불릴 만큼 신형 전함을 건조하느라 늘 돈이 궁했던 그의 마지막 수단은 화폐 타락. 은의 함량을 절반 이상 줄인 주화를 발행해 차익을 챙겼다. 화폐사는 이를 ‘통화대개악(Great Debasement)’으로 기억한다. 흉작과 악화가 부른 물가고에 지주들은 농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웠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던 1차 엔클로저(enclosure)에도 그의 영향이 밴 셈이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된 것은 16세기 후반. 아버지의 그늘 탓인지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 1세의 주화개혁으로 겨우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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