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외국인 적응 힘든 한국사회

이기섭 <한국릴리 부사장>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온 다국적 기업의 중역들은 거의가 월세 900만원 내지 1,200만원, 심지어 1,500만원 수준의 단독주택에서 산다. 대개 서울 성북동이나 한남동ㆍ방배동에 위치하며 그런 집들은 3년분의 월세 전액에 대해 일시불 현금이다. 주택 월세 임대 수입사업 치고는 최고 수준이다. 누구나 탐내는 사업이지만 그 투자 규모가 수십억원에 달하기 때문에 아무나 덤빌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떻게 그런 비용 지불이 가능할까. 무엇보다 어느 나라에서 근무하든 본국에서 생활수준을 보전해준다는 기준이 있다. 해외 근무하는 직원이나 가족들이 생활수준을 낮춰가면서 회사를 위해 일하라고야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큰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학교·병원등 생활여건 안좋아 한국과 같은 나라에 내보낼 직원을 선발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업무 수행능력을 갖춘 잠재력 있는 간부치고 선뜻 한국행을 선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중국처럼 잠재력이 큰 시장도 아니고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국제화된 여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가족들이 학교ㆍ병원ㆍ스포츠ㆍ쇼핑ㆍ취미ㆍ문화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학교에 빈자리가 없어 아이를 제때에 입학을 시키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좋은 예다. 아무 병원이나 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다. 좋아하는 치즈나 혹은 기호 식품, 음식물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대중교통 수단이 많이 개선됐다 해도 홍콩이나 싱가포르 수준보다 미흡하다. 택시를 타고 가다 행선지를 갑자기 바꿔야 하거나 밤중에 병원에 급히 가야 하는 경우, 버스를 타고 가다가 화장실을 급히 찾아야 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들이 그처럼 비싼 임대료를 일시에 미리 지불하면서 한곳에 모여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한국의 경우 선뜻 다른 지역에 홀로 떨어져 살기에는 너무 큰 모험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를 얘기할 때 흔히 세제 인센티브 제공, 규제 완화, 혹은 행정 서비스 개선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ㆍ문화적인 생활 여건이라는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간과되거나 가볍게 취급된다. 한국이라는 시장의 매력도 중요하지만 외국인들이 이웃ㆍ자연ㆍ사회제도에 별 어려움 없이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어쩌면 제도나 법규의 개선, 교통시설이나 문화시설을 만드는 일은 쉽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ㆍ문화적인 여건은 맘대로 다른 나라에서 베껴올 수도 없고 일시에 합의해 확 바꾸자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긴 세월 동안 역사를 통해 형성돼온 이웃을 대하는 태도,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 상거래 방식, 삶의 모습이나 가치관은 일시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가 21세기의 세계 중심이라는 발상이나 배타적인 민족주의,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지나친 경계의식, 동남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멸시, 혹은 타민족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 아니면 철저한 국제사회에 대한 무지나 다른 나라 사정에 대한 무관심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생활ㆍ문화 여건이 아직도 외국인들이 적응해 살기에는 힘든 곳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보다 보편적인 열린 사회ㆍ문화를 키워나가면서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 전통도 살려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사실 남북 이념 대립이 심할 때는 안보 문제가 투자 결정에 중요한 변수였지만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강대국간의 힘겨루기 문제라서 속수무책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ㆍ문화적인 우리 사회의 여건은 우리가 꾸준히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현저히 개선할 수 있는 일이다. 더불어 살려는 열린마음 필요 지나친 민족 우월주의나 편협한 민족 중심주의가 결코 21세기를 사는 태도가 돼서는 안된다. 더불어 살려는 열린 마음과 문화적 유연성이 새로운 문화적 코드가 돼야 한다. 어려운 문제는 그것을 배태시킨 동일한 차원의 사고방식과 태도로는 풀 수 없다. 단일민족이 갖는 획일화된 가치관은 많은 병폐를 낳는다. 입시 지옥, 부동산 투기, 학벌 만능주의, 혈연과 지연, 부정과 부패, 극단적인 노사 대립이나 연공서열이 좋은 예다. 외국인 투자는 단순한 경제적인 이해 득실에 때문에서만 필요하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순기능이 있다. 글로벌시대에 더 보편화된 기준과 투명성을 갖추려면 더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함께 살아야 한다. 다른 민족과 공존하며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21 세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외국인 투자가들은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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