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0년대 말 일본 도쿄나 오사카의 유흥업소에 취업했던 한국 여성들은 어렵게 번 돈을 국내로 송금하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 송금을 위해 현지에 있는 국내 은행들을 찾아가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되돌려보내기 일쑤였다. 몇 차례 찾아가고 나서야 겨우 보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원하는 액수를 다 받아주지 않아 절반 정도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의 암묵적인 외화유입 억제 정책 때문이었다. 무역흑자가 100억달러를 기록하는 등 달러가 넘쳐 인플레 우려 등 부작용이 생기자 일단 해외에서 송금을 불편하게 만들어 유입속도를 늦추려고 한 것이다. 몇 년 후 나라의 외화 곳간은 점점 비어갔고 그 결과는 IMF 관리체제였다. 당시의 송금억제가 외환위기의 직접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근원적 처방보다 우선 힘 안드는 수단을 동원하고 보는 이런 근시안적 정책이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해외소비 문제된 게 불과 몇 달전의 일
정부가 최근 ‘유출억제, 유입촉진’의 외환정책 기조 전환을 밝히고 나섰다. 기업의 해외자금조달과 부동산투자를 쉽게 하고 개인의 해외송금 한도와 절차도 개선하는 등 거래규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상황이 변하면 정책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외환보유액이 2,000억달러를 넘어 과다보유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너무 많은 외화는 경제에 오히려 부담을 줄 수 있다.
실제 환율하락의 부작용과 환차손 등의 폐해가 가시화되고 있기도 하다. 또 동북아 금융허브와 개방형 선진통상 국가를 주요 국정과제로 삼아 추진하고 있는데다 3단계 외환자유화를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외환거래 자유화 폭을 넓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정부의 움직임을 지켜보자면 혼란스럽다. 유학 및 연수, 골프관광, 미국ㆍ중국 부동산 투자 등으로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많아 문제가 된 게 불과 몇 달 전 일이다. 변칙ㆍ불법 해외송금자를 밝혀낸다며 은행들에 대한 조사를 벌이는 등 법석을 떨었고, 골프장 수백개 건설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이제 정부 관계자들은 달러가 밖으로 나가는 것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달러의 해외유출을 묵인하거나 듣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부추기는 느낌마저 주는 것이다. 몇 달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다만 외환보유액이 조금 더 늘었다는 정도인데 그거야 그때도 충분히 예상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송금조사 등 억제정책과 지금의 유출완화 정책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그게 아니면 장기적 안목 없이 그때그때 오락가락하는 냉ㆍ온탕식 정책 아닌가. 정책신뢰성을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소모성 외환유출은 득보다 실이 많다.
정책에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시기가 적절치 않으면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외화유출에 대한 유연성이 필요하다 해도 지금이 그때인가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현재 경제난의 이유는 여럿이지만 뭐니뭐니해도 내수부진이 가장 큰 원인이며 거기에는 해외소비가 무시 못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한은이 이 같은 소비패턴 및 구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내수침체가 장기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을까. 이런 터에 100만원 미만 환전 실명확인 생략, 증여성 송금한도 상향 등은 해외소비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달러유출이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니라지만 유출의 질(質)은 고려해야 한다. 국부를 키우는 투자 등 생산적으로 쓰여야지 그저 써서 없애는 소모성 사용은 현 시점에서 득보다 실이 많다.
달러가 정말 골치를 썩을 만큼 많은가라는 문제도 심도 있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 고유의 지정학적 컨트리 리스크가 엄존하는 가운데 한미관계에 마찰음이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외환보유액이 너무 많으니 ‘쓰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자’는 식의 정책은 곤란하다. 달러는 천덕꾸러기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