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율촌의 윤세리 변호사는 공정거래법 분야의 ‘원조’로 통한다. 공정거래법(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전에 국내외 기업들의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논문을 썼고, ‘재벌’로 통칭돼 온 대기업 규제 제도를 소개하기도 했다. 법 제정전부터 공정법 관련 논문 써… M&A분야도 탁월한 능력으로 두각
손댄 사건은 반드시 승소 이끌어내… 다국적 기업들엔 '저승사자'로 유명
"60세 넘으면 은퇴… 회고록 쓸 것"
윤 변호사는 이처럼 미개척 분야에 남들보다 먼저 한발을 내딛다 보니 외환위기 직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드러난 대기업들의 계열사 부당지원 사건을 비롯해, 2000년대 초반부터 수년간 법적 공방을 벌인 마이크로소프트(MS)와 인텔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사건까지 굵직굵직한 공정거래법 관련 분쟁은 윤 변호사의 손을 거쳐갔다. 윤 변호사의 실력은 국제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2004년 세계적인 금융전문지인 유로머니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공정거래법 전문 변호사로 선정됐고, 2005년에는 ‘세계 전문직업인 인명사전’(International Who’s Who of Professionals)에 등재됐다. ◇대학선배 박병원 전 수석이 진로에 영향=윤 변호사가 공정거래 분야에 첫 발을 내딛게 된 데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대학 선배와의 인생 상담이 계기가 됐다. 서울대 대학원 재학 시절, 윤 변호사는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선배에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선배는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공정거래법이 제정돼 시행될 테니, 이 분야를 개척해 보라”고 한마디 조언했다. 윤 변호사의 인생을 바꾼 이 대학 선배는 경제기획원에서 공정거래법 제정 실무를 담당했던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다. 두 사람은 서울대 법대 1년 선후배로 한때 같은 기숙사의 맞은 편 방에 숙식했던 절친한 사이다. 윤 변호사는 곧장 대학 도서관으로 향했다. 미국의 공정거래법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먼저 공정거래법을 주제로 미국 논문을 검색해 봤다. 그랬더니 논문수가 엄청나게 방대해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윤 변호사는 ‘10년 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정거래 분야가 기업 자문의 핵심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이 섰다. 그는 1980년 ‘불공정거래행위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국내에서 공정거래법이 시행될 경우를 대비해 다양한 법적 이슈를 다룬 것으로, 사실상 유일무이한 논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공정거래법의 입법론에 대한 논문만 존재했을 뿐, 실제 공정거래법에 담길 규제의 내용에 대한 것은 윤 변호사 논문이 1호나 다름없었다. 공정거래법 제정은 윤 변호사의 석사 논문이 통과된 그 해 12월 31일로, 윤 변호사가 공정거래 분야에서 얼마나 앞서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 경험은 종착이 아닌 기착=윤 변호사는 법무부 검찰 1과 과장으로 검찰 인사를 담당했던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의 강권으로 일단 검사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공정거래 분야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를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윤 변호사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무렵은 5ㆍ18직후로 검사를 지원하는 연수원생이 예년에 비해 많지 않았다. 신임 검사 숫자가 크게 줄 것을 염려한 김 전 장관이 ‘오래 근무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검찰에서 경험을 쌓으라’고 권하자, 윤 변호사는 마지못해 검찰에 지원했다. 그러나 윤 변호사는 곧바로 휴직계를 내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한국에서의 혼합기업 결합 규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는 한국의 특수한 기업 형태인 ‘재벌’이 어떠한 형태로 공정거래법의 규제를 받는지 외국에 소개한 최초의 논문이다. 공정거래법 전문가로서 윤 변호사의 실력이 빛을 발한 때는 외환위기 직후다. 그 전부터 공정거래위원회 법률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의 몇 안되는 공정거래 전문변호사로 이름을 알렸지만, 외환위기를 계기로 대형사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문어발식으로 사업영역을 확정하던 국내 대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면서, 이들 기업의 부당내부지원도 실체를 드러냈다. 삼성자동차와 한라그룹에 대한 부당 자금지원으로 공정위의 조사를 받은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이 모두 당시 윤 변호사의 고객이 됐다. ◇MSㆍ인텔 등 다국적 기업엔 저승사자=윤 변호사가 진가를 발휘하게 된 첫 사건은 마이크로소프트(MS) 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을 공정위에 신고해 2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 받도록 한 것이다. 미국의 IT업체 리얼네트웍스와 한국의 다음 커뮤니케이션스를 대리한 윤 변호사는 MS가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와 MSN 메신저를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 공짜로 끼워 팔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방대한 사실관계를 조사했다. MS는 두 프로그램을 공짜로 제공했기 때문에 판매행위로 볼 수 없고, 따라서 ‘끼워팔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항변했지만, 윤 변호사는 운영체제(OS)인 윈도우의 가격에 미디어플레이어와 메신저의 가격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강조, 수년에 걸친 공방 끝에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결정을 이끌어냈다. 그가 MS를 처음 신고했을 때만 해도 MS라는 거대한 기업을 상대하기가 부담스러웠는지 공정위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MS의 행위가 전형적인 ‘끼워팔기’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를 보여주면서 끈질기게 설득하자 2년여가 지나서야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조사에 나선 것이다. MS는 이후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처분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윤 변호사는 공정위의 대리를 맡아 법원에서도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세계적인 반도체 업체인 인텔이 1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 받게 된 것도 윤 변호사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다. 인텔의 경쟁사인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업체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스(AMD)를 대리한 윤 변호사는 인텔이 일정량 이상의 물품을 구매하면 물건값을 깎아주는 이른바 ‘로열티 리베이트’라는 개발한 가격책정방식을 도입해 한국시장에서 AMD를 퇴출 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입증해냈고, 공정위는 윤 변호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윤 변호사는 한번 손을 댄 사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기기 때문에 윤 변호사를 상대해야 하는 다국적 기업들에게는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M&A 분야에서도 두각=윤 변호사는 기업 인수합병(M&A) 분야에서도 국내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문가다. 특히 공정거래법의 ‘원조’ 답게 공정위의 까다로운 기업결합심사를 원만히 해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소문났다. 세계적인 법률잡지 ‘체임버스 아시아’(Chambers Asia)는 최근 ‘비즈니스를 위한 아시아의 선두 변호사들’이라는 코너에서 윤 변호사를 ‘재치 있고 냉정한 매우 뛰어난 협상가’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합병 후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는다는 이유로 합병과정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SK텔레콤의 신세기 통신 인수,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 등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기아차 인수합병건에서는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기아차가 퇴출되면 현대차의 시장 점유율은 어차피 상승할 수 밖에 없다. 차라리 현대차와 합병 시키는 것이 외국 자동차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하다”는 논리로 공정위를 설득해 끝내 관철시켰다. 윤 변호사는 “60세가 넘으면 일선에서 물러난 후 로펌 변호사로서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한번 써 보고 싶다”고 말한다. 후배 변호사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일종의 참고서를 내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원조’라는 단어는 단지 먼저 시작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며 몸을 낮추는 윤 변호사가 또 어떤 도전을 하고 나설 지 관심이다. ▲ 윤세리 변호사 약력
▦1953년 경북안동 출생 ▦1972년 경북고 졸업 ▦1976년 서울대 법과대 졸업 ▦1978년 사법시험 20회 ▦1980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1982년 하버드대 법학대학원 석사 ▦1983년 한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1986년 캘리포니아대 해스팅스 법과대학원 박사, 미국 베이커 앤 맥킨지 변호사 ▦1990년 우방종합법무법인 파트너 ▦1996년 공정거래위원회 및 서울시 법률고문 ▦1997년 (현)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