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5일] 장 보댕


장 보댕(Jean Bodin). 종교의 압제와 권위로부터 벗어난 근대 주권론을 세운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법학자다. 경제사상사에도 흔적을 남겼다. 화폐수량설을 제시하고 사유재산권을 강조해 경제학자로도 분류된다. 1530년 부유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도원에서 사제 교육을 받았으나 신학에 흥미를 잃고 16세부터 프랑스 남부 틀루제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법학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31세부터 파리의 고등법원 소속 변호사로 일하며 신학과 법학은 물론 정치와 역사ㆍ경제를 넘나드는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역사를 쉽게 이해하는 방법(1566년)’으로 필명을 얻은 보댕은 골칫거리였던 물가상승에 대해 ‘말레트루아씨의 패러독스에 대한 회답(1568년)’에서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는 금과 은의 실질적인 증가에 독점과 기근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화폐수량설의 선구자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댕의 인생 황금기는 1576년. 유력 가문의 미망인과 결혼(2월25일)해 재산과 사회적 배경을 얻고 대표작인 ‘국가론’도 펴냈다. ‘국가만이 질서의 수호자이고, 국가는 주권이 존재할 경우에만 성립한다. 국가에서 최고, 영속적, 단일적, 초법적인 권력인 주권은 군주에게 속한다’는 내용의 국가론 발표 이후 보댕은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신임을 얻어 라웅시의 궁정재판관에 임명되고 영국에 해외 사절로 파견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정부의 엄격한 주화 발행 및 관리를 주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종교적 관용과 개인의 사유재산권도 중시했지만 그 자신은 정작 14년 동안 1,085명을 처형한 마녀 재판관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정치와 경제사의 업적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것도 ‘확신과 신념으로 저지른 악행’ 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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