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19일] 영국, 케이프타운 점령


아프리카 대륙 남단 케이프타운. 영국군에 맞서던 네덜란드인들이 손을 들었다. 5,400여 병력을 실은 영국 함대가 케이프타운을 급습한 것은 1805년 크리스마스 이브. 네덜란드 수비대 2,000여명은 빈약한 무장에도 25일을 항전하다 1806년 1월19일 백기를 올렸다. 영국이 케이프타운을 공격한 이유는 나폴레옹에 대한 견제. 네덜란드 본국을 점령(1795년)한 프랑스가 케이프타운 식민기지에 병력을 보낼 경우 인도 항로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집트와 홍해를 경유해 인도로 진출하겠다는 나폴레옹의 꿈을 ‘나일강 해전(1789년)’의 승리로 막았던 영국은 요충지인 희망봉과 케이프타운 확보를 급선무로 여겼다. 케이프타운을 점령한 영국군은 잠시 빼앗았다 돌려준 1796년과 달리 병력을 주저앉혔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원료의 공급지이자 공산품의 소비지로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인도의 방위를 위한 중간 기항지가 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증기선 시대에 대비해 석탄보급기지를 미리 확보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영국은 결국 1815년 빈회의에서 영유권을 인정 받았다. 영국의 케이프타운 점유는 아프리카 식민화와 분할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장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들이 대거 북부 내륙지방으로 떠났다. 보어인들이 흑인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트랜스바알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에서 대규모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영국은 두 차례 전쟁(보어전쟁)을 벌인 끝에 1902년 두 나라를 영국령에 편입시켰다. 유럽 열강도 뒤질세라 영토확보에 나서 아프리카는 갈기갈기 찢겼다. 소말리아와 앙골라ㆍ르완다ㆍ나이지리아ㆍ모로코 등 오늘날 아프리카의 내전 또는 종족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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