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통신비밀보호법은 어디에…

김선정<동국대 법학과 교수>

지난 며칠사이 우리 국민들은 고난도의 게임을 봐야 했다. 의외의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워낙 익숙해 있던 터라 잘 정리해가며 볼 줄 아는 우리 국민들로서도 꽤나 헷갈리는 양상이었다. 이 일을 누구는 ‘안기부 불법도청사건’이라 불렀고 누구는 ‘X 파일사건’이라 했다. 처음에는 정경과 권언의 유착 문제라는 보도가 잇따르며 그 예로 기아 인수 문제가 오르내리더니 갑자기 자살미수사건이 일어났다. 매우 어렵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도청사건의 물증이 쉽게 확보되고 상황의 진전에 따라 모든 정당이 정파적 속내를 드러내며 우왕좌왕했다. 크게 봐서 같은 편이라고 할 보수신문끼리의 대립적 논조도 음미해야 했고 어떤 방송사는 ‘다 불면’ 자기 방송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관련자의 말을 보도했다. 등장인물이나 단체가 늘고 소문과 추측이 무성해지면서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관심은 깊은 염려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잡혀가는 것도 같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나라의 각 영역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과 단체들은 이성적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이번 사건의 본질을 곡해해서는 안된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어디까지나 중요 국가기관 공무원이 한 도청의 불법성이다. 명백한 불법행위 문제를 제쳐두고 불법의 결과물인 테이프의 내용이나 공개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가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그곳에 사태의 본질이 있다고 고집한다면 언젠가 자신이 불법행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법을 밝히겠다고 불법이 자행되고 그 불법자료를 공개하거나 원용한다면, 그래서 건질 만한 내용만 있는 경우에는 아무런 침해행위도 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사생활의 보호,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이 포기된 사회로 간주될 것이다. 테이프 내용의 공개만이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그로 인해 훼손된 통신비밀보호법 역시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보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구체화한 법이기 때문이다. 이들 헌법적 가치는 어느 것이 앞서거나 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으로 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절차적 정당성 없이 다른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런 관점에서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면 이 역시 범법행위라는 검찰의 논조는 당연한 것이다. 아울러 누군가가 누설할 것이니 차라리 테이프의 내용을 모두 공개하자는 그럴듯한 주장은 우리 사회를 무법천지로 전제하는 우려할 만한 발상이다. 유죄의 증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수사의 단서로만 삼자는 주장 역시 법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테이프의 공개 문제를 다루기 위해 특별법을 만들자는 생각 역시 버려야 한다. 한쪽에서는 내용을 공개해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으니 법을 만들자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법 제정을 거부하면 약점이 있는 것처럼 비칠 터이니 동의하자고 해 법을 만들 일인가. 그런 당파적 목적으로 법이 제정된다면 그 법은 통신비밀법 및 동법이 추구하는 헌법상 권리들을 함께 생매장하는 법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언론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연혁적으로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 문제는 공권력에 대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편집권과 취재원 보호가 주요 주제였다. 이미 1890년 워렌과 브랜다이스가 하바드 로 리뷰에 기고했듯이 언론에 의한 사생활 침해도 문제였다. 그러기에 미국에서는 공중의 ‘알 권리’를 실현한다는 이유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재하는 행위에 대해 민ㆍ형사상의 책임을 묻는 판례가 많다. 그러나 지금 이런 전통적인 문제들에서는 비켜 있다. 오히려 취재원은 노출되고 공개를 제한하려는 법원의 노력은 헛일이 됐다. 각 언론사의 태도도 독자나 시청자에 대한 세뇌 작업에 나선 것처럼 맹렬했다. 알 권리는 표면적 명분일 뿐 경쟁이 격화된 언론시장에서 결국 무엇이 편집 방향과 논조를 결정하는지를 우려하게 만들었다. 언론은 앞다퉈 서로를 훼손하며 결국 황색 저널리즘의 단면을 보였다. 이제는 테이프 공개만이 공익인지 잘 생각해야 할 때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지금 어디에 가 있나. 불법도청행위에 철퇴를 가함으로써 실정법의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이번 사태 해결의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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