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송현컬럼] 시장을 통한 초과이익공유

우리 모두 공감시장경제를 구축하는 지혜를 모을 때가 됐다. 정치인들은 오래 전부터 '따뜻한 시장경제' 또는 '포용적 세계화'를 즐겨 제창했으나 경제학자들과 경제관료들의 반응은 대체로 대중 인기영합주의라고 단순하게 매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복지와 상생을 놓고 온 나라가 편이 갈라지는 이 판국에서 시장과 반시장의 흑백논리만 가지고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어렵고 올바른 답을 구하기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에 기본으로 돌아가서 우선 시장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시장은 풍요의 온상인가. 약육강식의 정글인가. 있는 그대로의 시장은 두 얼굴을 모두 가진 야누스다. 이익을 좇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 여과 없이 분출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부의 축적이 이뤄지는 곳이 시장이다. 반면 사기와 착취가 적나라하게 자행되는 곳 또한 시장의 감춰진 추악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시장의 역기능을 순치하는 역할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에 맡겨졌다. 공정거래ㆍ중소기업보호ㆍ노동보호ㆍ산업재해ㆍ소비자보호ㆍ사회안전망 등을 거쳐서 마침내 초과이익공유제까지 거론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시장의 잘못된 점을 정부가 바로잡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시장은 인간의 이기심만 발호하는 곳인가.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심 외에도 남을 동정하고 배려하는 덕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를 고취하면 시장 내재적인 자기 교정적 기능이 생길 것이고 이것이 정부 간섭보다도 더욱 친시장적이고 지속 가능한 해결방안이다. 경제이론은 이익의 극대화가 모든 경제주체의 행동목표라는 기본전제에서 출발한다. 공동체정신이라던가 희생정신은 아예 눈을 감아버리던가 사회학과 심리학의 범주로 치부해버린다. 그 결과 이익을 좇는 행위를 가로막는 시도는 반시장적 또는 좌파적인 것으로 거부당한다. 경제행위를 할 때 모든 사람이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것은 아니다. 회사가 어려워도 끝까지 종업원을 끌어안고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기도 하고 빌 게이츠처럼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공감의 본성이 있다. '노동의 종말'을 쓴 제러미 리프킨은 또 다른 저서인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같이 고통을 느끼는 본성이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즉 타인의 어려움 앞에서 동정을 느끼고 도와주고 심지어는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공감의 본성을 이익추구의 본성과 함께 경제의 추동력에 포함시키면 경제행위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주주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선사하기 위해서 임금과 납품가격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대신에 종업원과 협력중소기업도 함께 가야 할 동반자로 인식하고 긴 호흡으로 상생의 길을 찾으려고 할 것이며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이 주주이익의 지속적 증대에 오히려 유리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이념의 덫에 빠져 있다. 초과이익공유제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일언지하에 거부해버리는 것은 단견이다. 내 식구 챙기는 것은 선행이고 같이 고생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은 금기시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우파와 좌파의 경계는 고정되지 아니하고 흐르는 것이다. 지난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 재정지출을 늘리고 노동조합을 보호하며 금융규제를 강화했을 때 보수 쪽에서는 사회주의의 망령이 출몰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했던 개혁의 많은 부분은 미국 체제의 한 부분이 됐다. 상생경제는 시장 내재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최선이며 이를 위해서는 공감의 시장경제로 바뀌어가야 한다. 시장이 못하면 정부가 개입하는데 정부는 남의 주머니의 돈을 가지고 선심을 쓰기 때문에 많은 폐해를 야기한다. 자기 주머니 돈으로 협력중소기업을 지원해야만 중소기업도 자구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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