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4월24일, 광주시 시외버스터미널 앞 북동성당. 가두진출을 시도한 농민시위대가 경찰에 막혔다. 농민들의 단식 9일째인 5월2일, 당국이 손을 들었다. 보상금이 지급되고 연행자가 풀려났다. 2년 반을 끌어온 함평 고구마 사건의 종결이다. 관의 횡포에 맞선 농민이 거둔 최초의 승리인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겼다.
발단은 76년 9월 농협의 고구마 수매 정책. 얇게 썰어 말린 건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사들이겠다는 방침에 농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가마당 300~400원씩 이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좋을 수밖에.
전량 수매를 약속한 농협이 실제로 사간 물량은 생산량의 40%. ‘걱정 말라’는 농협을 믿었던 농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 기회도 잃었다. 전체 손해액은 1억4,000만여원으로 추산됐지만 신고액은 160개 농가의 309만원. ‘피해 신고자는 빨갱이’라는 정보기관의 협박이 먹혀 들었다. 당국의 은폐와 재갈 물린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도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되고 마침내 피해를 보상받게 된 것은 카톨릭농민회의 조직력 덕분이었다.
피해보상 이후 농협이 주정업자와 결탁해 80억원을 유용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언론에 ‘단군 이래 최대 부정’이란 타이틀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이듬해 터진 ‘경북 안동 감자 사건’(썩은 감자 씨앗을 불하한 사건ㆍ농민 지도자 오원춘씨 납치 감금, 테러로 표면화), YH여공 사건과 함께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부패구조가 얕잡아봤던 농민층에 의해 절대권력이 붕괴되는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함평 사건 당시 전남도지사는 유력 대권후보군의 한 사람이다. 고구마의 분노가 들끓었던 함평에서는 나비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세월무상인지, 세상이 좋아진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