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리포트]EU-美 '통신개방' 신경전세계 통신시장의 합종연횡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초대형 합병이 속속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대륙을 횡단하는 합병도 본격화되고 있다.
올초 영국의 보다폰 에어터치사가 독일의 만네스만을 숱한 우여곡절 끝에 합병한데 이어 이번엔 독일의 도이체텔레콤이 미국 이동통신회사인 보이스스트림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도이체텔레콤의 보이스스트림 인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일단 가격면에서 종전 기록을 가볍게 넘어선다. 보이스스트림 인수가격으로 도이체텔레콤이 제시한 금액은 507억달러. 이 자체는 기록적인게 아니지만 보이스스트림이 설립된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가입자가 230만명(최대규모인 베리존의 가입자는 2,590만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액수다. 가입자 1인당 가격이 2만달러로 종전 기록인 8,000달러(올초 프랑스텔레콤의 영국 오렌지 인수당시 가격)의 2.5배에 달한다. 도이체텔레콤이 보이스스트림의 가격을 이처럼 높게 제시한 것은 미국 전체인구의 70%를 커버할 수 있는 보이스스트림 네트워크의 향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도이체텔레콤의 최대주주가 독일 정부라는 점. 외국 정부가 대주주인 통신회사가 미 통신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관련법규는 외국 정부가 25%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통신회사가 미국 통신회사를 인수할 때는 매매가 공익에 합치하는 것인지 조사, 제한을 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독 정부는 도이체텔레콤의 지분 58%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한술 더 떠 미국의 일부 의원들은 외국정부가 2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통신회사는 아예 미국 통신회사를 인수하지 못하도록 법률을 고치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일부 의원들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한다고 밝혔다. 미 행정부의 생각은 현행 법을 통해서도 제한할 수 있는데 굳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세계무역기구(WTO)규약을 위배한다는 비판을 자초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처럼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보이스스트림이 도이체텔레콤의 자금으로 차세대 이동통신 면허를 딸 것이기 때문이다. 도이체텔레콤이 미국의 차세대 이동통신사업자중 하나가 되는게 불안한 것이다.
통신시장의 국경을 넘어선 합병붐은 90년대 들어와 미국을 선봉장으로 한 선진국들의 통신시장 개방압력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외국의 통신시장 개방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였으며 이에 힘입어 미국 회사들은 세계 각국의 통신회사를 줄기차게 인수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외국 회사가 미국 통신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서자 미국의 경쟁력, 국가 안보를 들먹이며 저지할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나 국회의원들은 외국 정부가 대주주인 통신회사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일뿐 외국의 민간회사가 미국 회사를 인수하는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은 외국의 민간회사와 외국 정부가 대주주인 회사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비판하면서 미국 정부 및 의회가 구체적인 저지움직임으로 보일 경우 정면승부도 불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또 도이체텔레콤의 정부지분이 계속 줄어든데다 독일 정부는 앞으로도 지분이 없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매각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는 상황이라는게 도이체텔레콤의 주장이다.
유럽의 통신국경을 허무는데 가장 적극적이었고 이로 인한 이익을 많이 본 미국이 자국의 통신국경은 보호하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비판이 미국내에서조차 적지않다.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한 신경제를 통해 사상 최장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이 막상 자국의 시장개방이 눈앞에 닥치자 구경제적 사고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같다. 그만큼 앞으로 통신시장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뉴욕=이세정특파원BOBLEE@SED.CO.KR
입력시간 2000/07/2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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