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80년대란 잊혀지지 않은 살아 있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지던 기억, 혹은 거리의 시위대에게 박수를 쳐주었던 기억, 그것도 아니면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피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기억이라도 머리 속 어딘가에 조금씩은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있었던 학살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전히 분노하고, 그 시절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몸을 날렸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연민한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영화 '오래된 정원'을 통해 그는 80년대라는 시대를 최대한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황석영 원작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그는 임상수 만의 독특한 차가움으로 원작의 뜨거움을 덮어버린다. 전작이었던 '그때 그 사람들'에서 2000년대의 시각으로 70년대의 객관화했던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시대에 뛰어드는 대신 철저히 제3자의 입장에서 시대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표면적으로는 '오래된 정원'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여기에 그 시절 사람들의 고민들을 적절히 녹여놓았다. 영화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다 감옥에 갇혔던 사회주의자 오현우(지진희)가 17년 만에 출소하면서 시작된다. 뜨거웠던 그 시절과는 달리 차갑게 식어버린 자본주의의 2000년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감옥에 들어가기 전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옛 여인 한윤희(염정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한윤희의 흔적을 찾아 예전에 두 사람의 사랑의 추억이 얽힌 공간 '갈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와의 옛 추억을 회상한다. 이제 감독은 이 회상의 형식을 빌려 80년대를 살아가던 현우의 고민과 이를 바라보는 윤희의 삶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소설이 사회주의자 오현우가 달라진 세상에 나온 뒤 거치는 재생의 과정을 그린 반면, 영화는 철저히 한윤희에게 관심의 초점을 둔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밝히는 그녀. 하지만 대학교정의 어설픈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실천하는 삶을 사는 그녀의 모습을 영화는 담담히 응시한다. 세상을 바꾸자는 처절한 구호 대신 심신이 지친 사람들의 차분한 쉼터가 되어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학생 운동에 투신하는 후배를 향해 "인생 길어, 역사는 더 길어, 우리 제발 겸손해지자"라고 일갈하는 대사에서 80년대를 말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진희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대부분 안정감 있고 탄탄한데, 특히 염정아가 빛난다. 그녀는 한윤희라는 인물을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실제 인물처럼 재창조해냈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이중적 면모를 모두 가진 복잡한 인물의 내면이 그녀를 통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