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31> 이 고통이 멈추면... 그게 정말 끝일까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 몰아친 순간, 많은 사람들이 신을 찾습니다. ‘제발 이 고통을 멈춰 주소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가슴에 품어둔 사표 생각이 나는 직장인,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 전선에 뛰어든 취준생 등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강도를 표준화하거나 한계치를 획일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저마다 다른 ‘인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 너 나 할 것 없이 ‘고통을 끝낼 방법’을 갈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각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바로 고통에 무감해지는 것입니다. 죽은 피부를 도려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이 무던해지는 것. 당장은 훨씬 편해지겠죠. 그러나 무감각해진다는 건 고통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즐거움, 환희, 기쁨과 같은 긍정적 감각에도 무감해지는 것이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아이를 보고 우리는 ‘애어른’ ‘애늙은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적 나이에 걸맞는 감성이 아니라 인생 다 산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어떤 자극에도 ‘그저 그렇게’ 반응하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본인도 어린 나이에 더 어린 동생을 돌보고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하는 경우엔 열이면 아홉 이상이 애어른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의 손길과 돌봄이 필요한 일곱 살 짜리 아이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기에 스스로를 지키려 세상 풍파 다 겪은 어른 마냥 무던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삶의 즐거움을 좀 못 느껴도 아픈 것보다 낫다면 ‘무던해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실 누구나 특별히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발끈하게 되는 콤플렉스처럼 말이죠. 그러니 특정 부위에 얇은 막을 겹겹이 쳐야 합니다. 마음에 ‘굳은 살’을 만드는 겁니다. 여러 사람이 와서 콕콕 찔러대도 느끼지 못하게 내가 취약한 그 부위만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거죠. 자기계발서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기최면입니다. ‘달라고 기도했으면 이미 주신 것으로 믿으라’는 성경 구절처럼 ‘괜찮다, 난 당신이 뭐라 해도 신경 안 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주문을 외는 것입니다. 처음엔 무슨 효과가 있나 싶지만 반복적으로 학습하다 보면 적어도 비슷한 상황에는 덜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은 살을 벗기고 나면 더 빨갛고 연한 살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겹겹이 쳐놓은 방어막을 뚫고 고통의 폭풍이 몰아닥치면 속수무책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자초하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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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만연되어 있던 저주”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고통은 고통 자체로 끝나지 않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고통의 근원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입니다. 이유와 의미만 분명하다면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다’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통을 이기고 ‘초인’으로 살기 위해서 니체는 어린 아이처럼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억지로 마음에 굳은 살을 만들지 말고 모든 걸 껴안고 가라는 건 조금은 잔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모든 에너지를 나를 방어하는 데만 쓰는 게 삶을 잘 살아내는 거라 말할 수 있을까요?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지금 간절하게 원하는 게 이뤄진다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 속 해피엔딩을 담보할 수 없죠. 몽고메리의 소설 속 주인공 ‘빨강머리 앤’은 말했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건 정말 멋지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고통의 수많은 변주를 대응하는 방법보다는 고통을 껴안으라는 ‘초인정신’이 더 매력적인 비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이 고통이 멈춘다고 그게 고통의 끝은 아닐 테니까.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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