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이모티콘' 세대

부호를 통해 감정을 나타내는 문자를 ‘이모티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모티콘’이 정말 언어라고 할 수 있나. 이모티콘은 컴퓨터나 핸드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의 문자ㆍ기호ㆍ숫자 등을 조합해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법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문자나 기호를 사용자의 정서에 따라 활용한 것이 이모티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판 위에 6으로 새겨진 숫자를 시프트 키와 함께 중복 사용하면 ‘ ^ ^’이 돼 ‘웃는 모습’이라는 의미로 달라진다. ‘^ ^ ’라는 부호는 웃는 모습을 연상케 하지만 꼭 웃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모티콘을 전혀 모르는 세대가 이 형상을 본다면 아무 의미 없는 낙서로 치부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언어일까 아니면 또래 집단의 은어라고 보는 편이 옳을까. 이모티콘을 언어로 받아들이는 최근의 현상은 언어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개념을 빌리자면 언어는 이념(idea)에 가까운 현상이다. 언어는 구체적 실재를 대신하는 추상의 결과물로서 현상으로 이뤄진 세계를 개념화하도록 도와준다. 언어를 통한 작업을 이성적 결과물로 보는 태도도 여기서 비롯된다. 전통적으로 언어, 특히 문자 언어는 이성을 상징한다. 이를테면 ‘슬프다’라는 표현은 슬픔이라는 무정형의 감정을 이성으로 정제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을 눈물로 표현하는 것과 “나는 슬프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인 셈이다. 이모티콘이 사용되는 예는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네티즌 혹은 휴대폰 사용자들간의 경제적 대화를 위한 암묵적 합의이다. 이 암묵적 합의는 의성어 혹은 의태어의 역할을 대신한다. 상대방의 말에 대해 ‘재미있다ㆍ즐겁다’라는 반응 대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싱긋 웃는 모습의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초성만을 딴 ‘ㅋㅋ’나 ‘ㅎㅎ’도 마찬가지이다. 두번째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는 애매한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이모티콘이다. 말줄임표나 휴지가 담당하던 부분을 이모티콘은 사교적 에티켓으로 대신한다. 이때 이모티콘은 의미라기보다 일종의 태도라고 보는 편이 옳다. 세번째는 관습적 사용이다. 인터넷 채팅이나 문자메시지 대화 도중 대화 창 건너에 앉아 있는 대화 상대자에게 여전히 접속 중임을 알리는 표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모티콘의 용례는 그것이 언어 이전의 원초적 표지임을 잘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 부족함은 언어의 고결한 세련화를 추동해온 긍정적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바로 그 결과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는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오코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염결성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진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과 정서에 가까워지기 위해 문학은 언어를 단련한다. 이모티콘이 덜어주는 것은 바로 세련화의 수고다. 이모티콘의 득세는 합리적 이성보다 감정의 표현이 중요해진 현대사회의 풍경을 반영한다. 프랑스의 미디어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는 “좌파는 언어를 선호하고 우파는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언어란 자신의 이념과 사상ㆍ신념에 대한 표현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이모티콘은 분명 언어보다 이미지에 가깝다. 0과 1로 분리된 디지털 감수성은 그 사이의 무한한 점들을 무시한다. 점멸하는 부호로 구성된 이모티콘 역시 수많은 감정을 배제한다. 여기서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에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역설이 가능해진다. 감정 없는 감정 언어, 그것이 바로 이모티콘의 실재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