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원,한보·기아처리실기 “위기” 경고 무시/한은도 금융안정 뒷전 밥그릇싸움만 몰두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 외화를 「구걸」하고 경제주권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하면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당국자를 추적,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가 경제가 파산상태에 이른 것은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기업, 근로자, 국민, 언론 등 모두의 공통적인 잘못 때문이지만 당국이 상황인식과 정책대응을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재정경제원 등 정책당국은 안이한 상황인식과 잘못된 정책대응으로 오히려 혼란을 증폭시켰고,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에서도 미숙한 대응과 조바심으로 경제주권을 사실상 다 내주고 말았다.
올들어 발생한 대기업의 부도사태가 금융부실로 이어지고 기아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각계에서 위기상황이 올 것임을 계속 우려했고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들도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할 수 있음을 기회있을 때마다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를 묵살한 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한국정부가 지난달 19일 발표한 금융산업 구조조정계획을 6개월만 앞당겼어도 금융위기를 모면했을 것이라는 프레드 버그스텐 국제경제연구소장의 지적은 정부의 정책 실기에 대한 매서운 질타에 다름아니다.
특히 재경원과 한국은행은 안이한 상황판단으로 대응시기를 놓쳤을 뿐 아니라 내부마찰과 상호분란을 일으켜 오히려 화를 증폭시켰다.
재경원은 구경제기획원과 구재무부 출신간, 또는 정책라인과 금융라인간에 상호 불신을 일삼고 번번이 마찰을 일으켜 실책·실기·실효의 「3실부처」라는 오명을 얻었다.
한은은 한은법 개정에 대한 시각차로 임직원간에 마찰을 빚고 중앙은행 사상 유래없이 총재사퇴 서명까지 하는 등 상하간 반복·괴리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업무수행에 일대 차질을 빚었다.
소위 「밥그릇 싸움」으로 진흙탕에서 질척거린 이들 두 기관은 금융개혁법안 처리과정에서 극심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재경원은 한은을 설득하기보다 경제를 담보로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에 주력했고, 한은은 나라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길거리투쟁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연초에 발생한 한보사태는 국가경제 부도의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청문회와 검찰수사과정에서 관치금융, 정치금융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정치인과 은행장들이 무더기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감독당국인 재경원과 한은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부승진잔치를 벌였을 뿐이다.
지금 재경원이 IMF에 떠밀려 「난도질」하고 있는 종금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이들의 「안식처」역할을 해왔다. 구조조정의 일차대상인 종금사와 은행의 협회장이 모두 구재무부 출신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감사자리는 대부분 한국은행과 은행감독원 출신이 도맡아 차지했다. 이같은 낙하산 인사가 금융기관 부실의 중대요인 중 하나임은 자명하다.
기아사태가 장기화된 것은 추락하는 우리 경제에 짐을 가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기아처리의 가닥이 잡힌 후에도 금융·외환시장의 혼란은 더욱 증폭됐다. 강경식 전부총리겸 재경원장관이 뒤늦게 물러났으나 이미 사태는 수습키 어려운 국면이었다. 정책불신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임창열 부총리를 비롯한 새 경제팀은 비교적 빠른 결단을 하고 외화유입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이미 바닥에 떨어진 정책불신을 회복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들은 또 IMF와의 협상에서 너무 조바심을 내고 미숙하게 대응, 사실상 「백기」를 들어 국민들이 정부에 걸었던 마지막 기대마저 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청와대에서 이면협상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공개, 예금인출사태가 일어나는등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한심한 모습까지 보였다.
우리나라는 개발시대의 잔재를 처리하고 세계적인 규제완화의 파도를 한꺼번에 받아야 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정책·감독당국의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게 정립돼야만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한계가 분명치 못하고 원칙이 왔다갔다하면서 결국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한 국가의 경제주권을 외국에 넘긴 국치상황에서 나라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당국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와 희망은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다.<김준수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