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등소평 사망/집단체제속 강택민에 무게중심/향후 중국 권력구조

◎이붕 주도 보수파와 당분간 권력균점/‘카리스마·비전 부재’… 군부동향 관심최고실력자 등소평이 사망한후 강력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에서 중국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중국당국은 지난 수년간 등의 사망설이 나돌때마다 후계체제의 완비로 혼란은 없을 것이라고 밝혀왔다. 등의 생전에 구축된 강택민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 중심의 후계체제가 이미 뿌리를 내렸다는 자신감을 과시한 것이다. 그러나 등의 사망이 현실로 닥친 지금 북경의 권력체제가 지금까지 자신했던대로 가동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통적으로 법보다는 인물의 비중이 강했던 중국특유의 권력구조 속성상 등이라는 막강한 후견인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강택민 후계체제가 순항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사후의 권력구조향방은 강주석이 후계체제를 완전히 굳혀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로 부상할 수 있는냐로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 강은 매우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지난 89년 천안문사태이후 권력전면에 등장, 등의 주도면밀한 후계체제 구축계획에 따라 7년여간의 수습기간을 거치면서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등은 지난 89년 강의 권력기반을 강화키 위해 자신의 마지막 공직인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준데 이어 93년 3월 국가주석직을 겸임케해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또 92년 14차 전당대회에서는 예상치 못한 정변으로 기존정책이 흔들리는 것에 대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헌에 못박았고 93년 제13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에서는 헌법에도 이를 명시했다. 94년 4중전회와 95년 5중전회 결의를 통해 권력이 집단지도체제로 운용될 것임을 대내외에 공포, 자신의 사후 절대권력자 출현을 막고 개혁·개방정책이 흔들리지 않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등이 자신의 후계구도에서 보수파를 배제한 것은 아니다. 북경보수파를 대표하는 이붕 총리와 강주석의 연합을 통한 보혁세력간의 균형을 유지, 강택민 후계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이렇게 볼때 강은 모택동 사후 과도기적 지도자로 단명한 화국봉과는 전혀 다르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를 핵심으로한 집단지도체제가 등의 사망을 계기로 권력투쟁에 돌입하거나 개혁 개방노선이 흔들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지도체제는 각 세력이 균형을 이룰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다. 강은 등사후에 대비, 권력기반안정 차원에서 당주석제 부활을 추진, 오는 제15차 당대회에서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와 권력유지의 최대요소인 군부의 지지기반이 약한 그가 단일지도체제를 구축하더라도 주요 정책결정은 집단지도체제로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집단지도체제의 아킬레스건은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재연 가능성이다. 고도경제성장에 제동이 걸리고 지역 계층간 소득격차, 부정부패 등의 악재가 심화될 경우 개혁·보수파간 권력투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안순권> ◎떠오르는 실력자들/이붕­천안문진압 강경보수파/교석­‘킹메이커’ 전인대의장/이서환­지식층기반 온건주의자/주용기­개혁노선 경제조타수 최고실력자 등소평 사후 중국은 강택민 주석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주요 정책결정에 관여할 중국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붕(68)=국무원총리인 이는 48∼54년 옛 소련에서 엔지니어 교육을 받은 후 기술관료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87년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88년 총리가 됐다. 옛 소련식 중앙집권 경제계획의 신봉자로 알려진 그는 89년 조자양이 옹호한 자유개혁을 대신한 보수주의의 회귀 속에서 승리자로 부각됐다. 보수파의 지지를 받았던 이의 아버지는 국민당에 의해 살해됐으며 그후 그는 중국의 초대총리로 존경받았던 고 주은래의 양자로 들여졌다. 그러나 천안문학살에 광범위하게 연루된 그는 인민들로부터 인기가 매우 낮다. 그의 즉각적인 거취는 내년 총리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교석(72)=교는 현재 중국의 의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상무위원장(의장)이나 그의 영향력은 주로 국가의 안보 및 정보를 책임졌던 전력에서 나오고 있다. 16세때 당료로 출발한 그는 66∼76년 문화대혁명기간 중 박해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위상은 87년 축출된 개혁주의자 호요방 당총서기와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계속 높아갔다. 그는 등사망이후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용기(68)=주는 91년 부총리로 임명된 뒤 1년만에 국가경제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상해시 주요당직을 거쳐 88년 강택민에 이어 시장이 됐으며 89년 소요 당시 상해에서 유혈사태를 피해 인민들로부터의 신임이 두텁다. 실용개혁주의자인 그는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경제개혁이 실패할 경우 국내에서 희생양이 될 위험도 있다. ▲유화청(81)=현존하는 대장정시대의 몇몇 고참중 하나로 유는 당의 중심에서 군부를 대표하고 있다. 82년 해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고 있다. ▲이서환(63)=목공출신으로 한때 국가모범노동자 칭호까지 받았던 이는 자신의 고향인 천진에서 시장직에까지 올랐으며 89년6월 천안문사태 후 정치국원에 임명됐다.온건 개혁주의적 성향의 그는 지식인층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호금도(55)=52세에 정치국원에 오른 호는 호요방 당총서기와 당원로인 송평의 후원아래 지난 80년대 승승장구했다. 그는 85∼92년까지 귀주성 및 티베트 당위서기로있음으로써 호요방과 조자양의 숙청기간 중 화를 면할 수 있었다. 92년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승진했다. ▲박일파(89)·만리(81)=등의 측근으로 부총리를 역임한 박은 만리처럼 실용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등의 개혁정책을 강력히 공개적으로 지지해왔다. 전인대상무위원장을 역임한 만리 역시 등의 경제개혁을 열렬히 지지하는 온건파로 분류되고 있다. ▲추가화(71)·팽진(95)=상해 테크노크라트인 추는 91년4월부터 부총리로 재임, 군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중국공산주의 창시자인 팽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수파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안순권> ◎강택민 누구인가/개방­실용노선 추구/상해파 대표주자/1920년 강소성서 출생 ‘이선념사위’/문혁때 실각… 76년 복권/상해당서기때 「등」에 의해 발탁 강택민(71)의 현재 공식 직함은 공산당총서기 겸 국가주석. 등의 사망으로 강택민은 이제 12억 인구의 실질적 국가원수이자 5천만 당원의 우두머리, 그리고 3백30만 인민해방군의 최고 통수권자로 발돋움하게 됐다. 강이 중국 권력구조의 세 기둥인 당·정·군의 최고지위를 움켜쥔 것은 지난 93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 이후다. 하지만 그가 모택동과 등소평에 이어 제3대 영도자로 예고된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 지난 89년 6·4 천안문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조자양의 뒤를 이어 총서기에 임명된다. 강의 등극은 상해파가 중국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상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택민은 1920년 강소성 양주시의 지식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때 국가주석에 올랐던 이선념 전 국정협주석의 사위였던 그는 상해교통대학 전기과에 재학중이던 46년 4월 공산당에 입당, 공산청년당 활동을 주도했다. 현 정치국 상무위원인 교석과 부총리 겸 외교부장 전기침은 이때 그와 함께 지하활동을 한 인물이며 현정치국위원 정관근과 부총리 이람청 등은 상해파의 맥을 잇는 그의 직계들이다. 졸업후엔 모스크바로 유학, 전문공업기술을 익혔다. 상해전기과학 연구소 부소장 등을 거치면서 그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대표주자로 우뚝선다. 그러나 그는 66년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실각, 한동안 은둔생활로 접어든다. 76년 복권, 전자공업부부장을 거쳐 85년 상해시장에 임명된 강은 87년엔 중앙정치국위원과 상해시당위서기를 겸임하게 된다. 그는 영어, 일어, 불어, 루마니아어 등 외국어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86년 학생시위 당시 시위학생들 앞에서 링컨의 게츠버그 연설을 영어로 암송하기도 했다. 거문고, 대나무피리 등 예술 감각도 뛰어나다. 강택민에게는 그러나 높아진 지위만큼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시장경제완성과 지방·중앙간 갈등 종식, 불어닥칠 민주화요구와 소수민족문제 해결 등은 그의 최우선 과제다. 강이 이같은 문제들을 원만히 풀지 못할 경우 모택동의 후계자 화국봉이 등소평에게 축출돼 야인으로 물러난 전철을 되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김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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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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